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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냐시오 로욜라(St. Ignatius Loyola) 축일 본문
성 이냐시오 로욜라(St. Ignatius Loyola 1491-1556) 축일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고 기사가 되려고 생각했고 1517년에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생애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하여 가족들에게 후송했다. 회복기에 접어들자 가족들이 가져다 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책으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로 하여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가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로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이 시기는 이냐시오에게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보아 출신인 파브르(P. Faber), 나바라(Navarra) 출신인 사베리오(F. Xaverius),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으로 이들은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발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이냐시오는 동료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 속에서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 신비 체험을 통해 얻어낸 영적 통착력을 기록한 영성수련(靈性修鍊 Spiritual Exercises)’은 근 500년 동안 지역과 신분 및 생활상태에 구애됨 없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쇄신에 크게 기여하여 교회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2
성 이냐시오의 후예
☞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lhard de Chardin, 1881~1955) 신부
프랑스의 가톨릭 예수회 사제이자 고생물학자였던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1881년 5월 1일 프랑스 중부 끌레르몽 훼랑드에 가까운 오베뉴(Auvergne)에서 평범한 가정의 열 한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지질학에 조예 깊은 아버지한테 떼이야르는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함께 돌, 식물, 동물 등에 관해 많이 듣고 배우면서 그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
18세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근대 자연과학의 세계관, 특히 진화론적 세계관과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종합할 것을 제창하고, 그 실현을 지향했다. 영국에서 철학, 신학을 공부하고, 1911년 30세에 사제로 서품될 때까지 신학 외에 지질학, 인류 고생물학에 몰두했고, 이후에도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이 부문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져 1914년부터 전선에 나가 위생병으로도 근무했다. 대전이 끝난 후 1919년말에 전선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와 ‘포유류의 전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단기간 교편을 잡은 후 교수가 되어 그 곳에서 잠시 강의를 맡았다. 그러나 1923년 교회로부터 정통 교리의 충실성에 대한 의심을 받아 강단을 떠나게 된다. 예수회 장상들은 그의 진화론적 인간관과 과학적 종교사상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그의 진화론적 인간관과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진화를 앞으로 이끌어 가는 신, 즉 과학적으로 추론된 신에 관한 새로운 사상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그가 속한 예수회로부터 해외 주재 연구라는 구실로 중국으로 파견해서 1923년부터 1946년까지 20년 이상 중국에서 지질학과 고생물학 연구에 열중했고 그 동안(1929년)에 인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난 북경 원인(北京原人)을 발굴했다.
또한 이 때에 중국지리학회 고문으로서 중국, 아시아 북부의 고생물학과 층위학의 연구에 종사하고, 이 사이 주구점 동굴의 발굴조사에 참가한 것 외에 중앙아시아, 인도, 버마 등에 대한 수많은 탐검에 참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6년에서 1951년까지 다시 파리로 돌아와 ‘파리 과학 연구원’과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연구와 교수 생활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교수 활동이 교회 당국으로부터 제약을 받고 있던 중 1951년 인류학 연구기관인 뉴욕의 웨느-그렌(Wenner-gren) 재단의 상임 연구원으로 초청받아 우주적 규모를 가진 특별한 생물학적 단위로서의 인류의 유전적 구조를 밝히는 연구에 몰두했다. 재단에서 남아프리카로 파견되어, 사하라사막 이남의 생물의 기원을 탐구하다가 1955년 4월 10일 부활대축일 아침 세상을 떠났다.
* 탐검 시의 서간집(《어느 여행자의 편지》 1956)으로 인해 그의 사상이 철학 •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아서 교직에서 쫓겨나고, 자작 출판도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금지되었으며 아카데미 드 시앙스에 대한 추천도 교황청의 명령으로 철회되었는데 그가 뉴욕에서 학구생활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 《현상으로서의 인간》(1955), 《신의 영역》(1957) 등 그의 저작은 차례 차례 출판되어 많은 갈채를 받았지만 1962년 검사성성(교리성성)에서 그의 사상에 대한 주의서를 발표하는 등 교황청의 경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정신과 물질, 신체와 영혼, 자연과 초자연을 통합하여, 우주적 시점으로 정리해 낸 20세기의 위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확립되었다.
생전에 그의 사상은 이단적이라고 위험시되고 원고는 출판 금지당했으나 사후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안팎에서 선풍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현대 과학에서 지적 윤리적 위기를 발견하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심지어 인류 멸망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테이야르는 자신의 과학적 진화론과 그리스도론에서 인류의 미래를 멀리까지 낙관적으로 예시했기 때문이다.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종교 사상》- 대구 가톨릭대학출판부
이 책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lhard de Chardin, 1881~1955) 신부의 인간과 세계, 우주와 하느님에 관한 진화론적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한 자연과학계 교수들과 함께 샤르댕 신부 사상을 연구한 책이다. 당시 많은 신학자들에게 냉대와 비난을 받아 왔던 샤르댕 신부의 우주관과 종교사상은 이 저서에서 떼이야르 샤르뎅 신부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학자이자 사상가임을 학계에 신학적ㆍ영성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
☞ 드 뤼박 추기경이 예수회 총장의 부탁으로 샤르댕 신부 사상을 신학적 측면에서 세심하게 분석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묵상' '인간 현상' '진화와 자유' '우주의 변모' '떼이야르의 그리스도인' 등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의 영역》- 분도 출판사 저자: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번역: 이문희(전 대구대교구장) 대주교
- 목차
- 프롤로그 긴요한 조건
- 서론
1부 능동성의 신화
2부 수동성의 신화
- 편자 부기
1, 2 부 결론
3부 신의 영역
- 에필로그 재림을 기다리며
- 발문
*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완역 도서
《떼이야르 신부가 장따 여사에게》- 분도 출판사
《물질의 심장》- 분도 출판사
《그리스도(분도)》- 분도 출판사
《세계위에서 드리는 미사》- 분도 출판사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 분도 출판사
《인격적 우주와 인간 에너지》- 가톨릭대학출판부
성 이냐시오의 후예
☞ 오귀스트 뿔랭(Augustin Poulain 1836~1919) 신부 - 신비 신학자
오귀스크 프랑소와 뿔랭은 프랑스에서 1836년에 태어나 1858년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신비 신학자의 길을 걸어 온 그는 성직자, 영적 지도자, 사서, 수학자, 저자, 학자의 삶을 오랫동안 살았다. 그의 생애에서 40년 동안 연구 및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걸작인 계시와 비전을 담은 저서들을 지었다. 뿔랭 신부는 1919 년에 생을 마감했다.
- Baciccio, Apotheosis of St Ignatius
c. 1685, Oil on canvas, 48 x 63.5 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원본 : http://www.wga.hu/art/b/baciccio/apotheos.jpg [본문으로] - 1522년에서 1648년 사이에 종교개혁에서 제기된 문제를 가톨릭교회 나름대로 참된 개혁을 통해 극복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사조를 종식시키려 한 가톨릭 개혁(Catholic Reform)운동인 반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St. Ignatius Loyola)의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를 창설하여 참된 가톨릭 생활을 부흥시키려 하였다.
당시 가르멜회의 부흥운동으로 아빌라의 데레사(St. Teresa of Avila)에 의한 ‘맨발 가르멜’ 창설 등이 대표적인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이 계속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던 것은 교황과 트리엔트 공의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밀라노의 가롤로 보로메오(St. Calolus Borromaeus)는 공의회의 모든 결정사항을 실행에 옮겼고, 제네바의 프란치스코 살레지오(St. Francis de Sales)는 참된 가톨릭교의(doctrine)와 신심을 부흥시키는 데 전력을 쏟았다.
세속군주 중에서도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그의 왕비인 영국인 메리 튜더(Mary Tudor) 같은 이는 이 개혁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영국과 스코틀랜드, 영국과 스페인, 폴란드와 스웨덴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거의 2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종교전쟁에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의 결과 가톨릭교회는 제도와 조직이 강화되었고, 세속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복음전파사업에 전념하였다. (⇒) 가톨릭개혁 - 참고 [가톨릭 사전]
[본문으로] -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란 - 그리스도 교인의 삶을 심화한 형태》저자: 윌리암 존스톤 신부(예수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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