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d's Feet on High Places
칼을 이겨낸 붓 본문
| - 삼백여든두 번째 이야기 | |
광복 7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을 마련하였습니다. 7월 13일부터 8월 17일까지 6회 분의 ‘고전산문’ 내용은 개화기/일제 강점기의 한문 작품들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당시 지식인들의 눈으로 본 시대상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광복이 갖는 의미를 재조명하려 합니다. 또한 '중앙SUNDAY'에 이 글이 실리는 관계로 6회에 한해 일요일에 메일링 발송하게 됨을 알려드리오니 널리 양해바랍니다. |
칼을 이겨낸 붓 | [번역문]
내 친구 석양정(石陽正) 중섭(仲燮)*은 왕가의 후손으로 시를 짓고 글씨를 쓰는 풍류가 있었다. 그림은 즐겨하지 않았는데, 손댔다 하면 곧잘 그려내 대나무 그림은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우리는 그와 어울려 놀면서 그가 그린 그림을 한쪽이라도 얻으면 간직하였으니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두어 해 전 전쟁 통에 우리는 피난 가느라 조수(鳥獸)처럼 서로 흩어졌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중섭은 적의 칼날을 피하지 못해 팔이 거의 끊어질 뻔하다 이어졌다. 그 뒤 행조(行朝)**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서로 생사를 묻고 위로하는 말을 건넸을 뿐 가진 그림에 대해서는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 다시 서울에서 만나 옛날 작품 가운데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탄식들을 하자, 중섭이 보따리에서 이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것은 부상당한 팔이 붙고 난 뒤 그린 대나무와 난초와 매화 그림이었다. 얼른 펼쳐 보니, 대나무는 옛날에 비해 더 뛰어났다. 중섭 스스로도 “조금은 변화된 곳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난초와 매화에 이르러서는 뜻이 말에서 표현되고 마음이 그림에서 드러나듯 하여, 비록 이전의 붓질에서도 드러내 보였으나 이번에는 그림 모두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비비고 보게 하였다. 이 정도라면 세상에서 하나의 기예로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여기에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 석양정과 중섭은 각각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의 봉호(封號)와 자(字)이다. ** 행조(行朝) : 난리로 피난길에 나선 조정.
[원문]
吾友石陽正仲燮. 王孫也. 而有騷墨之風. 於藝有不爲. 爲則必能. 蚤以竹鳴於世. 吾儕游從. 得其所爲隻紙而藏之. 不知其幾也. 頃歲兵戈中鳥獸竄. 相失苟活. 仲燮不免鋒刃. 臂幾折而續. 嘗相遇於行朝. 勞問死生外. 不暇叩所有. 今復暫聚都下. 相與咨嗟. 疇昔所爲. 無一存者. 而仲燮從橐中出此卷. 乃續臂後所爲竹若蘭若梅也. 亟展視之. 則竹如舊又勝. 而仲燮亦自言差有化處矣. 至蘭也梅也. 與夫志發於言. 心形於畫. 雖皆昔之斑斑已見者. 而今也擧能使人刮目. 雖世之自以一絶得名者. 不得而幾也. - 최립(崔岦, 1539~1612), 「삼청첩서(三淸帖序)」, 『간이집(簡易集)』 권3 |
▶ 탄은 이정의 ‘순죽(筍竹)’ (<삼청첩> 수록 작품). 간송미술관 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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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미술관의 ‘매, 란, 국, 죽-선비의 향기’ 개막전이 열리던 지난 6월 3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찾았다. 지난해 봄부터 시작된 ‘간송문화전’ 시리즈의 4번째 전시였다. 늦은 오후, 특별한 의식 없이 개막한 전시장에는 일찍부터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간송미술관의 터줏대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소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한복 차림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개막날이어서인지 문화예술계 명사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물론 전시장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그림들이었다. 한음 이덕형의 ‘묵죽’, 조속의 매화 그림 ‘묵매’, 유덕장의 눈 맞은 대나무 그림 ‘설죽’, 심사정의 매화, 최북의 국화, 김홍도의 매화, 김정희의 난초 등은 모두 교과서나 화첩에서나 볼 수 있는 명품들이었다. S라인을 따라 이어진 전시장을 따라가며 옛 그림을 보는 감동과 흥취는 간송의 미술품이 아니면 느끼기 어렵다.
그런데 뭇 명품들 속에서도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었다.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삼청첩(三淸帖)>이었다. <삼청첩>은 세 가지의 깨끗한 물건, 즉 대나무와 매화, 난을 그리고 자작시를 함께 엮은 시화첩이다. 이번 전시에는 <삼청첩>에 포함되어 있는 대나무 그림 12폭, 매화 그림 4폭, 난 그림 3폭, 난과 대나무가 어우러진 난죽도 1폭 등 20폭 모두가 나왔다. 먹물을 들인 비단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작품들은 최근 보존처리를 한 덕분인지 마치 방금 그린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 진열된 작품 가운데 ‘순죽(筍竹)’은 막 죽순이 땅에서 솟아나오는 듯 보였고, 난과 대나무를 한 폭에 그린 ‘난죽(蘭竹)’은 두 군자가 고고한 기상을 뽐내듯 하였다.
나는 작품들을 다 감상한 뒤 전시장 첫머리에 있는 <삼청첩> 앞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꼼꼼히 작품을 보고 싶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 그림첩이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담고 있음을 알았다. 위의 「삼청첩서」는 바로 곡절 많은 <삼청첩> 제작 경위를 기록한 글이다.
왕실의 후손으로 태어나 시문으로 풍류를 즐기던 탄은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칼을 맞아 팔이 끊어질 뻔한 부상을 당한다. 붓을 잡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간신히 팔을 잇게 된 탄은은 예전보다 더 그림 공부에 몰두한다. 그리고 2년 뒤인 1594년 12월, 부상을 딛고 완성한 그림이 바로 <삼청첩>이다. 작품을 본 탄은의 친구 간이(簡易) 최립은 <삼청첩>을 앞에 두고 눈을 비비며 감탄했다. “이는 세상에서 기예로 이름을 얻었다는 사람이라도 다가갈 수 없는 경지이다.” 최립은 친구 이정의 예술혼과 불굴의 의지를 칭송하며 그를 위해 그림첩의 서문을 헌정한다. 그것도 모자라 최립은 또다시 「석양정이 보여 주고 놓고 간 삼청첩에 제하여 돌려주다[題石陽正見留三淸帖以還]」라는 시 한 수를 써 건넨다.
병란 후 삼 년 만에 이렇게 만나니 옥 같은 그림 한 권 남겨 두셨구려 팔뚝 거의 부러질 지경에 조물주 그대 보호하여 그대의 여생, 나로 하여금 눈 멀지 않게 하였네 맑은 향기 어찌 종이의 그림 속에서만 취했겠는가 굳센 절조 어여쁘니 눈과 더불어 논할 만하네 혼을 불어넣는 그림 솜씨야 예전부터 아오마는 시와 글씨 또한 풍류가 넘쳐 흐르네 | | 三年此會干戈後 一卷仍將琬琰留 造物全君幾折臂 餘生及我未昏眸 淸香豈取供花事 苦節應憐與雪謀 久識傳神推妙絶 詩篇字法又風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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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자신의 그림과 자작시를 묶은 두루마리 앞에 최립의 서문을 붙여 <삼청첩>이라 이름 붙인다. 그리고 표지의 제호를 당대 최고의 서예가 석봉 한호에게 부탁한다. 이처럼 <삼청첩>은 ‘해동삼절’로 불리는 이정의 그림, 최립의 글, 한호의 글씨가 한데 어우러진 보물이다. 불행히 병자호란을 겪으며 화재로 최립의 서문 일부와 한석봉의 표제 글씨가 불에 탔다. <삼청첩>의 표제는 뒤에 동춘당 송준길이 다시 쓴 것으로 알려졌다. * ‘매, 란, 국, 죽-선비의 향기’전은 8월30일까지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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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조운찬-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 경향신문 편집국 문화부장과 문화에디터, 베이징특파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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