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d's Feet on High Places
성요한 보스꼬사제 축일 본문
전교가르멜재속회
성요한 보스꼬사제 축일
성지
2013. 1. 31. 19:26
어린시절 요한 보스꼬 성인전을
읽으며 행복했던 신비스런 모든
기억들이 올해에도 새롭네요. ^^
하느님 요한 보스꼬 성인에게 주신
성덕을 현세의 저희들에게도 허락하소서!
어린이를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알려주시는
요한 보스꼬성인님 우리를 위해 빌어주세요.
| 오늘의 성무일도(Ⅲ권 P1334~1336) 제2독서
성 요한 보스코 사제의 편지에서 (Epistolario, Torino, 1959, 4,201-203)
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생도들의 참된 행복을 찾고 그들이 생활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인도해 주고 싶다면, 우리는 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부모를 대리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비단 나만이 아니고 살레시오회의 회원 전체가 그렇게 했습니다.
자녀들이여, 나는 나의 긴 생활을 통해서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얼마나 자주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은 더 쉽고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겠습니다. 즉, 참아 내지 못하고 오만한 성격을 지닌 우리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생도들을 참아 주면서 엄중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는 것보다 벌을 주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
|
성 바오로가 초심자들에 대해 지녔던 그 사랑을 나는 여러분에게 천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이 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랑은 바오로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에게 권고하게끔 해주었습니다.여러분이 주체 못하는 분노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를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벌을 줄때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거나 또는 분노를 폭발시키려고 행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필요하게 되는 그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우리 권하에 있는 이들을 우리 자녀로써 바라보도록 합시다. 명령하러 오시지 않고 순종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지배한다는 그런 인상마저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대하신 방법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은 무지하고 예의를 모르고 불충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도 자비와 애정 어린 지극한 친밀성으로 대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어떤 이들에겐 놀라움이 되었고 또 어떤 이들에겐 걸림돌이 되었지만 한편 다른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생도들이 진정 우리의 자녀라면 그들의 잘못을 고쳐 줄때, 우리는 온갖 분노를 재거해 버리거나 분노를 완전히 제어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로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여 주거나 또는 마음 상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잘못을 고쳐 주고 다 잘되게 해주는 참된 부모들처럼 지금은 자비를 베풀고 미래에는 희망을 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문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리는 것보다는 겸손과 항구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릴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
지칠줄 모르는 그의 활동과 사업 효과의 원천은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 와 그가 자신의 사업전체의 영감이자 후원자로 여겼던 도움이신 '마리아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다. 그는 살레시안 아들 딸들에게 단순하지만 ‘일과절제’ 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활동하는 관상과 굳건한 그리스도인 적인 덕행을 바탕으로 한 수도생활을 유산으로 남겼다.
|
|
| |
☞ 요한 보스꼬 성인의 생애
요한 보스꼬(1815~ 1888) 성인은 이탈리아 토리노 근교 시골마을 베키에서 출생했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위고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두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고도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성인은 9세 때 일생이 계시된 꿈을 꾸게 된다.
그 꿈을 계기로 사제성소에 열망을 품게 되었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이기에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남의 집 머슴살이나 상점의 점원 또는 직공 등을 전전하면서 신부가 되기 위한 소양을 쌓는 일에 전념하여 당시로는 늦은나이인 26세(1841년)때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요한 보스코 신부(일반적으로 ‘돈 보스코’라 부름)가 처음에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소년죄수들을 찾아간 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로 인해 많이 혼란했다.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시골 출신의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의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났다. 그는 많은 버림받은 청소년들은 이해해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면 정직한 시민 또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고 체험한다.
보살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소년들을 위하여 ‘오라또리오’라 부르는 기숙사를 세워 의식주를 마련해 주고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소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여 돕게 한다.
특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년들 가운데서 보다 성숙한 젊은이들이 보스코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초창기 오라또리오의 600명이 넘는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보스코 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행복해 했다. |
| |
☞ 예수님처럼 빵을 만드는 기적(물질창조)을 이루신 요한 보스꼬성인
각별한 사랑의 친밀감으로 소년들은 보스코 신부를 ‘돈 보스코’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삶을 의지하였다. 그래서, 처음 수도회 설립의 뜻을 젊은이들에게 밝혔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수도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파악하지도 않고 단지 돈보스코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칠 수 있다고 하여 1859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게 된다.
보스코 신부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이어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남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야간학교 등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동시에 2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경이로운 작가이고,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안에 심은 대영성가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는 확신처럼 돈 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보다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에 선종한다. 그리고 1934년 부활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