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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의 《서승경(西昇經)》 제19 우제이장(右第二章) 본문
* 율곤(律坤) 이중재(李重宰)선생님 말씀입니다.
《서승경(西昇經)》의 본문(本文) 중 우제이장(右第二章)은 제19장과 제20장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독자들은 이해하길 바란다. 특히 우제이장(右第二章)은 보는 바와 같이 관령(關令)인 윤희(尹喜)가 노자(老子)를 만난 후 노자(老子)가 듣고 기록한 문장이다.
關尹子曰 觀道者如觀水 是以聖人者 知道德混沌 玄妙同也 亦知天地淸靜 皆守一也 故與天同心而無知 與道同身而無體 而後天道盛矣 以制志意而還 思慮者也 去而不可逐 留而不可遣 遠者出於無極之外 不能窮之 近在於己人不見之 是以君子 終日不視不聽 不言不食 內知而抱玄 夫欲視亦無所見 欲聽亦無所聞 欲言亦無所道 欲食亦無所味 淡泊寂哉 不可得而味也 復歸於無物 若常能淸靜無爲 無自復也 返於未生 而無身也 無爲養身 形骸全也 天地充實 長保年也
관윤자왈(關尹子曰)이란,
관령 윤희가 말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윤자(尹子)란 윤희(尹喜)를 말하고 있다.
관도자여관수(觀道者如觀水)란,
도(道)를 볼 수 있는 자는 마치 물을 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즉 물을 본다는 것은 그저 물을 보는 게 아니라 물의 본질과 본성, 물의 생성은 물론 물의 본체적인 요건 모두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한 의미를 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물은 필자가 전술한 바와 같이 물은 많이 뭉칠 때 검은 색으로 변하여 보이게 되고, 물이 얕을 때는 푸르게 보이는 것이며, 물이 고체(固體) 즉 단단한 얼음이나 눈(雪)이 되면 희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물은 기체화(氣體化)되었을 때는 보이지 않으나, 물의 본질이 흰 것이므로 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은 만물의 생명체(生命體)를 창조하는 본질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물의 과정은 만유만물의 형성(形成)을 하기 위한 작용의 주인이므로 도(道)를 보는 자는 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老子西昇經第十九 右第二章(우제이장)
물은 우주 공간에서부터 천체는 물론 만물의 생명(生命)까지도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이므로, 도(道)를 보는 것을 물을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라고 하겠다.
시이성인자(是以聖人者)란,
곧 이는 성인(聖人)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대자연에 펼쳐져 있는 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도(道)를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녔다는 뜻이며, 따라서 물의 생성(生成)과 본질을 볼 수 있다면 성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덕혼돈(知道德混沌)이란,
혼돈함을 아는 것은 곧 도덕(道德)을 알고 있음을 뜻한다.
즉 탁하고 혼돈한 사회를 안다는 것은 도덕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도덕의 관념이 없는 사람은 사회의 혼돈을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현묘동야(玄妙同也)란,
검고 묘한 것은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즉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처럼 공간세계가 어둡고 묘한 것은 혼돈함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본문에서 현묘(玄妙)하다는 것은 혼돈함과 같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윤희(尹喜)가 잘못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혼돈(混沌)한 것은 현담(玄曇)하다든지 아니면 현현(玄玄)하다든지 해야만 혼돈과 혼탁과 같은 뜻으로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本文)에서 현묘(玄妙)는 혼돈함과 같은 것이라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현묘라는 것은 어둡고 묘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대성인(大聖人)들이 말한 현묘(玄妙)란 뜻은 윤희(尹喜)가 말한 혼돈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필자가 정리해 보기로 한다.
현(玄)이란 캄캄하고 검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묘(玄妙)라고 했을 때는 그 의미가 확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운 공간은 블랙홀을 뜻하며, 검은 공간세계인 블랙홀에서 죽은 별을 삼켜 광명의 빛을 발산하여 새로운 생명(生命)의 별을 탄생시키므로, 현묘(玄妙)란 대광명(大光明)의 빛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어두운 공간세계에서 묘(妙)함이 있기에 혼돈하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혼돈과 현묘(玄妙)와는 그 뜻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재론하자면 현묘는 우주 속에 수천 개의 은하수인 은하계(銀河界)가 수천 곳이나 있는 공간 속에는 블랙홀인 현묘(玄妙)의 대 광명의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혼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혼돈과 현묘는 같지 않으므로 독자들은 이해해 주길 바란다.
역지천지청정(亦知天地淸靜)이란,
역시 알고 보면 천지는 맑고 고요하다는 뜻이다.
즉 공간세계에는 무한 에너지의 우주가 있다. 이곳은 본문(本文)처럼 고요하고 또 고요하며 맑고 청정함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늘과 땅은 본질적으로 알고 보면 맑고 고요하며 깨끗함을 말하고 있다.
개수일야(皆守一也)란,
모두가 하나로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즉 모두가 하나로 지킨다는 것은 천(天)·인(人)·지(地)는 삼원일체(三源一體)이므로, 따지고 보면 대자연은 하나이므로 우주 공간 속에 있는 모든 천체는 하나로서 지키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고여천동심이무지(故與天同心而無知)란,
그러므로 하늘과 더불어 마음이 같으므로 아는 게 없다는 뜻이다.
즉 하늘과 마음이 같으므로 하늘은 공간세계이기에 하늘의 마음은 보이지 않기에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천(天)과 심(心)은 같은 것이기에 아는 바 없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므로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여도동신이무체(與道同身而無體)란,
도(道)는 몸과 더불어 같은 것이므로 몸이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도(道)는 자연(自然)이므로 보이는 자연(自然)이 아닌 보이지 않는 자연(自然)의 법칙이 도(道)이므로 도(道)의 몸은 같은 것이기에 몸이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自然)의 오묘한 법칙은 도(道)이므로 도(道)의 몸은 없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후천도성의(而後天道盛矣)란,
하늘의 도(道)가 성(盛)한 이후라는 뜻이다.
즉 하늘의 도(道)가 성하다는 것은 대자연의 법칙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한 이후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제지의이환(以制志意而還)이란,
이와 같은 뜻은 생각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즉 자연(自然)의 도(道)가 정해진 뜻은 결과적으로 생각함에 있어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사려자야(思慮者也)란,
생각을 도모하는 자란 뜻이다.
즉 대자연을 심오한 이치로 생각했을 때 자연(自然)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거이불가추(去而不可逐)란,
가는 것은 쫓으려고 해도 가히 쫓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자연(自然)의 도(道)에 대해 엉뚱한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자연(自然)의 도법(道法)을 쫓을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나간 것은 다시 쫓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문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난 것을 쫓는다는 것은 불가함을 말하고 있다.
유이불가견(留而不可遣)이란,
머물고 있는 것은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이다.
즉 도학(道學)의 수련 과정에서 학문적으로 이치가 맞는다고 생각되는 것은 쉽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원자출어무극지외(遠者出於無極之外)란,
먼 자가 나가는 것은 무극의 밖에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즉 먼 자가 나간다는 것은 아무리 자연(自然)의 법칙을 알고자 해도 알지 못한 것은 찾을 수 없으므로 무극(無極)의 밖에도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먼 자라고 하는 것은 대자연의 법칙이 아닌 것을 말하므로 아무리 자연(自然)의 도(道)에 대해 찾으려고 해도 무극(無極)의 세계 밖에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능궁지(不能窮之)란,
궁하고 또 궁한 것은 능히 이해하려 해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자연(自然)의 도법(道法)이 없는 궁한 상태라고 함은 심오한 진리(眞理)가 없는 것은 아무리 구하고자 해도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기에 도(道)의 수련은 구할 수 있는 법칙 이외에는 더 구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근재어기인불견지(近在於己人不見之)란,
가까이 있는 자기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아주 가까이 있는 자기를 보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일수록 자기를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잘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란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그러기에 진리는 가까이 있는 데도 잘 볼 수 없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말한다.
시이군자(是以君子)란,
가까이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군자라는 것을 말한다.
종일불시불청(終日不視不聽)이란,
종일 보지 아니하고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언불식(不言不食)이란,
말하지 않고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지이포현(內知而抱玄)이란,
마음 속 깊이 검은 것을 얼싸안고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깊고 오묘한 도(道)의 세계를 무한히 어두운 공간세계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도록 하여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심오한 진리의 자연(自然)의 도(道)는 보이지 않으므로 어둡고 오묘한 진리의 세계를 찾아 마음 속 깊이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욕시역무소견(夫欲視亦無所見)이란,
무릇 욕심을 부린다면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욕청역무소문(欲聽亦無所聞)이란,
욕심으로 듣는다면 역시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자연(自然)의 도법(道法)은 욕심으로 보고 듣거나 욕심으로 듣고 또 듣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의미한다.
욕언역무소도(欲言亦無所道)란,
욕심으로 말하는 것은 역시 도(道)가 있을 곳이 없다는 뜻이다.
즉 욕망으로 말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허욕이기에 도(道)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욕심이 깃든 말에는 도법(道法)의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으며 도(道)가 있을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욕식역무소미(欲食亦無所味)란,
욕심으로 먹는 음식 역시 맛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식충들은 맛을 보고 먹는 게 아니라 욕심으로 먹기 때문에 맛을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담박적재(淡泊寂哉)란,
도(道)의 수학을 하려면 깨끗하고 맑고 고요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머리가 산만하거나 주위가 소란스러울 때는 도(道)의 수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서 욕심 없는 고요함에서 도(道)의 수학(修學)이 가능함을 의미하고 있다.
불가득이미야(不可得而味也)란,
맛부터 얻으려면 불가하다는 뜻이다.
즉 도학(道學)의 수련 없이 막무가내로 도(道)를 통하려고 한다면 도(道)를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이란,
물질을 탐하지 않는 가운데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즉 속세의 인연을 끊고 탐욕을 버린 채 깨끗하고 맑은 정신과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도(道)를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약상능청정무위(若常能淸靜無爲)란,
언제나 깨끗하고 고요함이 있어야 능히 자연(自然)에 접근할 수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항상 젊고 깨끗한 마음과 고요함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무자복야(無自復也)란,
무위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반어미생(返於未生)이란,
욕망이 있는 자가 도(道)를 얻기란 불가능하므로 도(道)를 얻고자 하는 자는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무신야(而無身也)란,
몸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몸
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탐욕과 번뇌 그리고 순수하고 순결함으로 되지 않는 한 도(道)의 수행이 불가능함을 의미하고 있다.
무위양신(無爲養身)이란
자연처럼 몸을 가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자연은 변함없는 상태로 영구불변한 것과 같이 사람의 몸은 항상 변함없이 자연처럼 기르고 다져가야 한다는 뜻이다.
형해전야(形骸全也)란,
형체와 뼈가 있는 몸 전체라는 뜻이다.
즉 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아예 형체인 몸과 뼈마저 모두 없는 게 낫다는 의미이다.
천지충실(天地充實)이란,
천지는 충실하다는 뜻이다.
즉 천지는 욕심과 번뇌, 그리고 고통 따위는 인간(人間)처럼 없기 때문에 충실하다는 의미이다.
장보년야(長保年也)란,
몸을 해년 해마다 보호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윤희(尹喜)는 노자(老子)를 보고 탐욕을 버리고 대득도를 깨달을 때까지 몸을 보호하고 오래오래 살라는 충고의 당부임을 의미하고 있다.
* 본문(本文)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노자(老子)가 서역(西域)으로 가기 위해 경계의 관문(關門)에 이르렀을 때 관청의 관령(關令)이었던 윤희(尹喜)가 노자(老子)를 보고 당부하는 글이다.
윤희(尹喜)가 노자(老子)에게 말하기를 도(道)를 본다는 것은 마치 물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곧 이것이 성인(聖人)이며, 혼돈한 세상에는 도덕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바로 현묘(玄妙)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천지는 알고 보면 역시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에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에 대하여 필자가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생략한다.
천지(天地)의 자연(自然)은 모두가 하나에서 출발해서 하나로 끝나는 것이므로 윤희(尹喜)는 하나로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고로 하늘과 같은 마음은 본래부터 아는 바 없으므로 도(道)의 몸과 같이 형체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부터 하늘의 도(道)는 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뜻을 정하면 생각은 돌아오게 되어 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자에게 도(道)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미 지나간 것을 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머물고 있는 것을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멀리 있는 자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무극(無極) 밖에 있다고 했다. 그러기에 무극의 바깥쪽에 있는 무궁 무궁한 도(道)를 구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여기 가까이 있는 자기 몸도 잘 보이지 않는데 만약 볼 수 있다면 곧 이것은 군자(君子)라고 했다.
종일토록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하지도 먹지도 않고 마음 속으로만 도(道)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근본적으로 욕심을 갖고 본다는 것은 역시 있는 곳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道)를 열겠다는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있는 바를 잘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욕심으로 말하면 얼마간 도(道)는 없을 것이다. 또한 욕심으로 먹는 음식 역시 맛이 없으므로 맑고 깨끗하고 고요함이 없다면 맛을 얻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물질이 없는 것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물질이란 속세에 찌든 모든 것을 버리고 깨끗하고 맑고 빈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언제나 젊고 깨끗함 속에서 고요한 정신으로 자연(自然)을 탐구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연(自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태어나기 이전으로 되돌려서 자기(自己)의 몸이 없는 상태에서 다시 자연(自然) 그대로 상태에서 몸이 자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완전한 뼈와 살이 있는 형상을 갖추는 것이 하늘과 땅이 충실해지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어쨌든 몸을 보호하고 오래 살 수 있도록 건강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본문(本文)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윤희(尹喜)는 노자(老子)가 온종일 보지도 듣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하지도 먹지도 않고 있으므로 안타까운 심정에서 도법(道法)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간곡히 당부하고 있는 문장이다. 특히 도(道)를 얻기 위해서는 몸을 보호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쉽게 충고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윤희(尹喜)인 관령(關令)의 수준도 대단함을 알 수 있다. 노자(老子)가 윤희(尹喜)를 만나기 전 한두 번의 도(道)를 얻기는 했으나, 노자(老子)는 더 깊고 오묘한 도(道)의 경력을 쌓기 위해 서역(西域)으로 오르게 되었을 때 관령인 윤희(尹喜)는 노자(老子)의 얼굴에 기(氣)가 있는 것을 보고 이와 같이 충고하고 있는 문장이다.
노자(老子)가 서역(西域)으로 오르기 바로 전에, 공자(孔子) 나이 51살 때 노자(老子)를 만나러 간 일이 있었다. 그때 노자(老子)는 공자(孔子)를 보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 문장이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 》63권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 제3편에 기록되어 있다. 본문(本文)을 적고 해설해 보기로 한다.
老子曰 子所言者 其人與骨皆已朽矣 獨其言在 耳且君子得其時則駕 不得其時則 蓬累而行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말하는 것을 보니 그 사람의 뼛골이 이미 썩어버렸고 말만 남아있다. 나(耳:노자) 또한 군자(君子)는 때를 만나면 수레를 타고 관직에 나아가지만 그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이리저리 날라다니는 쑥대풀 같이 떠나게 되는 것이다.
노자(老子)가 공자(孔子)를 만났을 때가 몇 살인지는 알지 못하나 아마 공자(孔子)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 은연중 사서(史書)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공자(孔子)를 본 노자(老子)가 공자의 인상과 말하는 것을 보고 공자(孔子)의 뼛골이 썩었다고 할 정도 같으면 노자(老子)의 지적 수준(智的水準)이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노자(老子)가 공자(孔子)를 만날 때 당시만 해도 주(周) 나라 수장실(守藏室:사서관)을 맡고 있었던 시기에도 도(道)를 한두 번 정도는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노자(老子)가 관직을 그만 두고 관령인 윤희(尹喜)를 만나 윤희의 청으로 《도덕경(道德經) 》상·하권과 《십계경(十戒經)》, 도합 3권을 쓸 때만 해도 천문도(天門道)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도덕경(道德經) 》제5장에서 현묘(玄妙)한 광명의 세계를 기록하고 있고, 따라서 검은 공간세계인 블랙홀의 생성(生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本文)의 우제이장(右第二章)인 제19장과 제20장에 포함되어 있는 윤희(尹喜)의 말을 보면, 관령이었던 윤희는 대부(大夫:높은 관직으로 제후왕과 같은 직책)로서 대단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노자(老子)가 《서승경(西昇經)》을 쓰면서 윤자(尹子)라고 한 것을 보면 윤희도 성인(聖人)의 반열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本文) 우제이장(右第二章)편에서 윤희(尹喜)는 노자(老子)를 보고 하루 종일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먹지도 않고 있으므로 답답한 나머지, 윤희(尹喜)가 노자(老子)에게 충고(忠告)한 것을 후일에 노자(老子)가 대득도(大得道)를 통해 신인(神人)이 되었을 때 기록을 남기기 위해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 출처: 율곤학회[http://www.yulgon.kr/index.php : 사단법인 上古史學會 회장 율곤(律坤) 이중재(李重宰)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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