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스물세 번째 이야기
2015년 10월 29일 (목)
고요함 속에 숨은 굉음

개미 움직이는 소리 소 싸우는 소리
고요하긴 모두가 마찬가지지
누가 알까, 깊은 고요 속에도
땅을 뒤흔드는 파도 소리 있음을

蟻動與牛鬪
寥寥同一聲
誰知淵默處
殷地海濤轟

이이(李珥, 1536~1584) 
『율곡전서』 
「노승(老僧)의 시축에 쓰다[題老僧詩軸]」


  개미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는 귀 밝은 사람에게나 소리가 안 들리는 사람에게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소가 싸우는 소리는 다릅니다. 귀 밝은 사람에게 들리는 소싸움 소리는 엄청나게 큽니다.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는 소리, 화가 나서 발로 땅을 긁는 소리, 뿔이 부딪치는 소리, 달려가는 발굽 소리 등이 그 공간을 시끄럽게 뒤흔들어, 그 안에서는 긴장을 놓으려야 놓을 수 없을 정도니까요.

  이 시 제목 아래에는 이 시를 받을 사람이 ‘귀먹은 노승’이라는 글이 붙어 있습니다. 율곡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노승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기에 이런 시를 썼을까요? 서슬 퍼런 기세로 화두를 들던 젊은 날의 패기도 흐르는 세월 속에 내려놓고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된 노승이 보고 듣는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 노승에게는 개미 움직이는 소리건, 소 싸우는 소리건 다 안 들리겠구나.’ 생각했겠지요. 그러다 그 상태를 고요하고 평화로워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적멸의 경지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워 개미 움직임 소리도 소싸움 소리도 그 안에 모두 녹아든 경지를 생각하며, 분별 이전, 심(心)이 아직 발하지 않은 성(性)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깊은 고요 속에 땅을 뒤흔드는 파도 소리가 있다는 표현으로 성이 불교에서 말하는 적멸처럼 어떤 절대적인 경지 안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 두고 있는 듯합니다. 율곡이 「잡기(雜記)」에서 ‘사물에 감촉하여 통할 때는 정(情)이 되고, 또 느끼는 바에 따라 이리저리 궁리하고 헤아릴 적에는 의(意)가 되니, 성도 정도 의도 모두 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논한 것처럼 이 시에서도 그런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율곡의 시를 곱씹어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봅니다. 깊은 고요 속에도 땅을 뒤흔드는 파도 소리가 있다면 땅을 뒤흔드는 파도 소리 속에도 깊은 고요가 자리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땅을 뒤흔드는 파도 소리 속에서 뒤흔들리는 것이 세상살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깊은 고요를 응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고요 위에서 사물을 대하고 뜻을 내려고 노력한다면 그 가운데서 파도도 잦아들고, 소들도 싸움을 멈추겠지요.

  율곡 선생이 이 시를 쓴 마음도 과연 이런 마음이었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글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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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聖枝: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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