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네 번째 이야기
2015년 2월 5일 (목)
달빛 속을 거닐며 사람을 기다리다

좋은 이와 노년을 함께하고 싶으니
그의 모습 밤마다 꿈에 찾아오누나 
고향에서 만날 약속 장마도 잠시 걷혀 
언덕을 언뜻 보니 달이 높이 걸렸어라 
기러기 줄을 잇듯 편지 계속 정답더니 
그대 마침 소식 주어 답장을 전하였네 
봉창 아래 발자욱 소리 참으로 기쁘거니
이끼 낀 예 오솔길로 어서 찾아오시길

同歸惠好盡衰年
入夢儀形夜夜連
梓社留期霖乍捲
林皋偸眼月高懸
情知乘鴈行相續
會有雙魚報已傳
蓬底跫音眞自喜
莓菭一逕莫停鞭

이익(李瀷, 1681~1763)
「달빛 속을 거닐며 사람을 기다리다[步月候人]」
『성호전집(星湖全集)』 권3



   


  이 시는 성호 선생이 54세 전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 나이 때입니다. 꿈에 그리던 이가 오랜만에 찾아오는지 연신 서성이며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달이 훤히 떠올랐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 애가 탑니다. 노년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 마음 맞는 지기였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선생도 이제 만나려나 봅니다. 인생의 황혼 녘 빈들에 서서 설사 지난 회한을 눈물로 얘기한다 해도 나에게 어깨를 내어줄 이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한 달 전에 저도 꿈에 그리던 두 친구를 찾았습니다. 돌담 틈에 기어이 핀 제비꽃 한 송이에도 가슴이 먹먹했고, 순수했던 만큼이나 영혼이 시리고 아팠던 시절, 그 음울한 청춘의 한때를 기꺼이 동행해 준 벗들입니다. 숱한 밤을 새우며 문학의 꿈을 얘기했습니다. 밤하늘의 별 같은 시(詩)로 상처받은 이들의 등대가 되려 했고,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과 한편이 되고 싶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면서 세 문학청년은 등사기로 한 장 한 장 밀어 공동시집을 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다른 불안한 미래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시집 한 권을 들고 상경했던 저는 회색빛 절망이 꿈속까지 엄습하던 80년대를 버겁게 살아냈고, 채워지지 않는 불면의 술잔을 기울이며 쓴, 나약한 시들을 다 불태우고 나서 90년대를 맞았습니다. 이후 겨울바람에 흔들리던 앙상한 시인의 꿈도 미완의 그리움으로 남긴 채, 천 년의 숲 속 고전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래도 이따금씩 시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면 첫사랑처럼 그 친구들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차려야 할 가족의 밥상과 전쟁처럼 부딪쳐 오는 차디찬 일상의 순서들로 하여, 그들을 찾는 일은 아득한 먼 훗날의 숙제로 미뤄두어야만 했습니다.

  작년 12월에 우연히 만난 따뜻한 경찰의 도움으로 어렵게 어렵게 친구들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고갈되었다고 믿었던 그때의 열정이 그 질감 그대로 되살아나고 이들과 함께 다시 꿈을 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그 예감이 행복한 착각이 된다 해도 ‘좋은 벗들과 함께 걷는 길이 천국’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저무는 황혼의 오솔길을 함께 걸어갈 친구를 찾아서 행복합니다. 달빛 마당을 서성이며 어서어서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던 그날, 성호 선생의 즐거운 떨림이 280년 뒤의 이 후생에게도 격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저녁 저도 친구들을 만나러 갑니다. 33년 만의 해후입니다.

 

글쓴이 : 이기찬(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Posted by 聖枝: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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