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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 본문
★ 과거의 역사를 배우면 간접경험을 통해 현실에 대한 대처 감각을 익히게 됩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사관들이 궁궐의 행사를 기록해 놓은 책을 모두 사기(史)라고 통칭 했었다. 한(漢) 무제 때에 활동했던 사마천은 자신이 지은 <사기>를 스스로 태사공서(太司公書)라고 명명하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형식은 다음과 같다.
본기(本紀) : 12 편(왕의 전기),
표(表): 10 편(시대적 역사배경),
서(書): 8 편(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
세가(世家): 30 편(식민지, 여러 지역의 당시까지의 역사),
열전(列傳): 70 편(개인들; 저명한 정치가, 장군, 왕비, 조기탐험가를 연대순으로 배열)
사마천(BC145~BC86)은 <사기> 맨 마지막 130편에서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라고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첨부하여 자신의 가계(家系)를 열거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생애, <사기>를 쓰는 목적과 방법에 대해 서술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관직은 태사공(太史公)이었다. 아버지의 관직을 세습한 사마천 역시 천문(天文), 역학(易學), 도(道)를 배웠고 그로 인해 고대에서 부터 이어 내려온 제자백가들의 사상을 중추로 하는 여섯 학파들의 학설의 요지를 논하였다.
1. 유가(儒家): 공자(孔子 BC551~ BC479), 맹자(孟子), 순자(荀子)
2. 도가(道家): 노자(老子 공자보다 20세가량 많았음), 장자(莊子 BC359 ~ BC289)
3. 묵가(墨家): 묵자(墨子 BC468 ~ BC376)
4. 법가(法家): 한비자(韓非子 BC280 ~ BC233)
5. 명가(名家): 혜시(惠施 약 BC370 ~ BC310)
6. 음양가(陰陽家): 동중서(董仲舒 약 BC179 ~ BC104)
사마천은 열살 때 고문을 읽었다. 그는 중국의 전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벼슬길에 올라 낭중(郎中)이 되었다. BC 110년 부친 사마담(司馬談)이 사망한다. 당시 한(漢) 왕실의 봉선례(封禪禮)가 거행되었는데 즉 봉선례는 지금의 산동성 곡부 태산 정상에서 거행되던 천제(天帝: 하느님)께 바치던 제사였다. 사마담은 제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연고로 인해 상심하여 병이든 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가문을 위한 유언을 하고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부친 사후 3년 이후, 사마천은 왕실의 제도에 따라서 부친의 관직을 세습하여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태사령이 되자 사마천은 여러 역사 기록과 왕실 내 석실금괴(石室金匱)의 귀중한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 문학, 철학적인 소양을 무한히 넓힐 수 있었기에 방대한 <사기>의 저작을 이룰 수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 마지막편 '태사공 자서'에 "주(周)나라 주공(周公)의 사후 500년에 공자가 나타났고 공자 사후 지금까지 500년이 되었으니 과거의 밝은 세상을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역(易, 변화)의 전달을 바르게 하고 춘추를 계승하며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의 근본을 규명해야 할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고 천명하며 자신이 공자의 적통을 계승한다는 부모님의 유지를 받든다는 원대한 신념을 확고히 하였다.
사마천이 <사기> 저작에 종사하던 어느 날, 흉노를 토벌하러 출전했다가 포위 당해 어쩔 수 없이 적진에 투항한 이릉(李陵)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릉과 어떠한 친분도 없었음에도 우여곡절 끝에 황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하는 말을 발설하게 되는데 … 그로 인해 벌어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 불운한 사건, 그것은… 진노한 한(漢) 무제(武帝)가 사마천에게 궁궐 내시들에게 시술하는 궁형(宮刑)에 처하라고 하명함으로서 궁형 처벌 받았던 일… 그 사건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 '보임소경서'에 기록한 내용이 전해졌다.
그 불운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한(漢) 왕실을 냉철히 바라보게 되었고 또한 엄정한 시각으로 다양한 인간상에 대한 모든 면모를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마천, 그의 <사기> 제작은 신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서술로서 시대와 인물에 대한 역동성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 이천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현재에 이르러서도 무궁한 사랑속에 변함없이 읽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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