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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성삼일

성지 2015. 4. 3. 13:22

파스카 성삼일 전례




[출처] 길 위의 신앙 : 하느님의 길-사람의 길 제43호


마태오 26,14-25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온 유다인들은 정성껏 파스카 축제를 준비했고, 지난 날 이집트에서 선조들을 구원하셨듯이 지금도 쉼 없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축제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림의 축제, 해방의 축제, 구원의 축제에 어울리지 않게 예수님을 향한 세상의 단죄와 살해의 덫이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덫을 피하지도 않으셨고 피할 마음도 없으셨으며 담담히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을 던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셔야 할 예수님과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를 지울 사람들 사이에 유다가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재정을 맡을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먹은 패악 무도한 사람으로 모든 이에게 영원히 기억될 사람이 말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사람이 마치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범인 양 비난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저주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과 확실히 선을 그을수록 예수님을 향한 자신들의 믿음이 증명된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신성모독이라는 종교적 이유이든 대사제 카야파가 말했듯이 로마로부터 민족을 구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이든, 예수님을 향한 처참한 십자가의 음모를 스스로 꾸미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모든 이와 온 세상을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의 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지도자들과 이들에 동조하여 자신의 삶을 유지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쳐대는 군중들의 추악한 손에서 예수님을 구할 수 있는 권력도 지위도 없었습니다.

유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은 ‘예수님과 함께 죽느냐? 아니냐?’, ‘예수님께서 기꺼이 수락하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느냐? 아니면 제 살 길을 찾아 예수님을 떠날 것이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길이 길이 기억될 유다의 씻을 수 없는 죄는 주님을 가진 자들에게 돈 몇 푼에 팔아먹은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없었다 해도, 유다가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적대자들에게 팔아넘기지 않았다 해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순간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가 반갑게 인사함으로써 군사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하지 않았다 해도,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유다의 죄는, 죄와 불의와 탐욕에 물든 낡은 인간을 당신 닮은 모습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 찾아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여전히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자유를 포기하고 불의한 권력과 더러운 재물을 마다하지 않으며 온갖 우상의 노예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당당히 맞서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자신을 더럽힌 것입니다.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 반대편에 섰던 유다는 분명히 씻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분명 유다라는 추한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유다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의정부교구 송산본당 상지종 신부>



[출처] 길 위의 신앙 : 하느님의 길-사람의 길 제45호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조롱과 험담이 난무하는 그 사이를
말없이 걸어가십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그 길에
참담한 마음으로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조롱하는 군중들보다,
고개 숙인 예수님이
더욱 못마땅하게 여겨집니다.

왜 그렇게 순순히 걸어가십니까?
당신이 무슨 죄가 있어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생을 마치려 하십니까?
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지 않으십니까?
제발 뭐라고 말 좀 하십시오. 제발.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뿐입니다.
죽음을 향해.

답답해하는 나의 못마땅함도,
조롱하는 군중들의 시선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참을 수 없는 고통도
결코 주님의 십자가 길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생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
그것은 침묵이었습니다.
침묵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침묵 가운데 아버지를,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예수님의 침묵 가운데에서만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침묵 가운데 맞아들이신
십자가 죽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 안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욱 선명하게 우리를 파고 들어옵니다.
어떤 인간적인 말보다
더 강한 한 마디의 피맺힌 절규,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어떠한 인간적인 말로도
화려하게 치장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일 뿐입니다.
고통과 저주만이 가득한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현장.

그러나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자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 가득한 삶을 돌아봅니다.

죽을 수 없는 분의 죽음 앞에서,
죽으면 안 되는 분의 죽음 앞에서,
살 자격이 없는
그러나 버젓이 살아있는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당당하게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되새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곳곳을 헤집어
참된 삶을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런 삶,
온갖 탐욕에 물든 추악한 삶,
다른 이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길만을 찾는 이기적인 삶,
재물, 권력, 권위, 온갖 헛된 우상에
자신을 팔아버린 노예의 삶을 벗어 던지고

죽음을 넘어서는 참된 삶,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
가난한 이, 억눌린 이 없는 삶, 
자신을 내어 놓음으로써
모든 것을 품에 안는 삶을 살라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은
결코 강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은
분명 모든 이에게 내려진 선물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선물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선물을
기쁘게 받아 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값진 선물을
너무나도 쉽게 내팽개치는
안타까운 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로 내가
그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도 허무하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몹시 슬프고 괴롭고 참담한 날입니다.

그러나
정녕 그렇습니까?
온 몸 깊숙이 파고드는
못 박힘의 고통이
과연 나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곧 나의 삶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축 쳐진 주님의 주검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침묵을 듣습니다.
주님의 침묵 안에 담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외침을 듣습니다.

삶을 위한 죽음을 바라봅니다.
침묵 안에 당신을 묻어버리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가장 깊숙한 곳을 파고 들어오십니다.

나를 바라봅니다.
생동하는 생명을 바라봅니다.
나를 드러내려는
과장된 말과 몸짓을 바라봅니다.
떠들면 떠들수록
작아지고 공허해지는 나를 봅니다.
살고자 하면서 오히려
죽음의 길을 걷는 나를 봅니다.

나의 삶을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봅니다.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진정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죽은 듯 살고 있는 나를 일깨워
죽음을 넘어서는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 가득한 이 시간이기를 기도합니다.

<의정부교구 송산성당 상지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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