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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에 나타난 공자(孔子)의 '천명사상(天命思想)'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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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에 나타난 공자(孔子)의 '천명사상(天命思想)'

성지 2010. 7. 16. 23:14

논어(論語)에 나타난 공자(孔子)의 '천명사상(天命思想)'






☞ 공자의 천명 사상

  공자(孔子)는 BC 551년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 10월, 경자(庚子)일 노나라 추읍(鄒邑)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부친은 송(宋)의 몰락귀족으로 이미 육십을 넘긴 노인이었고 모친은 생산능력을 겨우 갖춘 어린 여자였으며 집안이 유업(儒業)에 종사(從事)하였다. 
공자가 태어났을 당시 고대부터 내려온 유(儒)라는 계층이 있었다. 그들은 신(神)과 인간을 연결하고, 죽은 사람의 혼(魂)과 교류하는 ‘토속종교인’들로서 유업(儒業)에 종사하였는데 장례담당자, 기도사(祈禱士)들과 같은 일을 하였다.


공자는 나이 세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 밑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여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동리의 궂은일을 돌봐주고 생계를 유지했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할지 고뇌하게 되었고 인간에게 근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한 나머지 자신이 학문을 닦아야 하는 일이 근본과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십오 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 세에 뜻을 확립했으며, 사십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들음에 거슬리지 않았으며, 오십 세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 子曰五十有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論語 ․ 爲政》 -




  공자는 학문에 항구하여 문화, 학문, 음악, 예절등 전반적 학문에 통달하게 되었으며, 특히 주(周)대의 문화를 완성시킨 주공과 오랜 세월, 이승과 저승, 생과 사라는 시공을 넘어 영적교감을 이루며 주대 문화의 풍요함과 그 중 인간중심사상을 접하고 주공을 흠모하고 존경의 대상으로 가슴속에 간직하게 되었다.


공자는 배움의 과정을 거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되었으며 고대문화의 전문가가 되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공자만한 인물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나름대로 각 의례(儀禮)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여 근본정신을 충실히 하였고 답습에서 벗어나 범위를 넓혀 인간도리를 다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라는 삶의 의문을 갖게 되었고 사십이 되어 확신을 지니게 되어 불혹을 확립하였다.


  공자는 혼란한 사회현상을 목도하고 개혁에 대한 투신을 결정하여 천명을 알았다고 했다. 그가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는 말은 자신이 할 일에 대한 높은 의미의 부여이자 종교적인 신념으로까지 표출된 사명의식이었다. 
공자는 우선 정치적으로 군주를 잘 보필하면 세상에 도가 실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니고  세칭 철환천하(轍環天下)라고 말하는 도가 실행되는 정치에 투신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그의 사상이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하였다.


공자는 인의 덕목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상을 제시하였으나 혼란한 시국과 이해득실이 얽혀져 그의 사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사회는 기존의 체제가 붕괴되며 사람들이 신분상승을 위한 각축전을 벌리게 되었고 절제하지도 않고 욕망을 분출시키며 패권(覇權)을 장악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계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공자는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자신의 천명을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자신의 여생을 후진양성을 위한 노력에 매진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당시의 지배층을 총칭하는 이름뿐인 군자라는 명칭에 내실을 다지는 품성을 가하여 완벽한 지도자상인 내용과 명칭이 합치되는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를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출신성분에 구애됨이 없이 군자의 품성을 닦은 자는 모두가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論語․衛靈公》


공자의 천명사상은 중국대륙에 이데오르기에 의한 사회주의의 변화의 물결이 확산되는 시점까지,  근 2500년이라는 수 많은 세월동안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사상에 뿌리깊은 역량으로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중국의 지도자인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상황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원시유가의 논점인 군자의 관념으로 회귀하여  그 해결방향을 찾아오는 전통을 고수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5%의 인구를 점유한 사대부들은 학자이자 정치인이기도 해서 유가사상으로 일관 된 95%의 민중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군자의식에입각한 사명의식을 지녔다.  때문에 개성을 궁극적인 가치로 추구하는 경향보다는 보편성과 사회성을 잘 지향하는 경향이 강하여 사회적인 질서나 보편적인 윤리가 더 중시되었고 문학활동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활동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대부라면 누구나 하는 일로 인정되었다.


☞ 현대 중국과 공자(孔子)사상

중국에서  군자(君子)의 사상이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은, 청말 아편전쟁(1840~1842)이 시작점이다. 이후 서구세력의 내정간섭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일본의 식민사관으로 인한 8년간 중국대륙을 장악한 전쟁이 발발하는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중국인들이 국가존망이 위협된다고 생각한 이 싯점에 막스-레닌의 사회주의 이념을 기치로 걸은 중국식 사회주의 혁명세력의 지도자로 모택동이 출현했다.


모택동은 '자주국가 건설', '봉건사관 철폐'라는 구호를 외치며 농부, 노동자, 학생, 여성, 지식인을 섭렵하여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이후 미국과 서구세력의 지지를 받는 장개석 정부에 대항한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 혁명군 사이의 내전은 '이만리 장정'이라는 긴투쟁을 거치며 전통세력의 수뇌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내었다. 그로인해 중국 대륙내에 유가적 전통 사상은 영원히 결별되었다.


지금 중국 학계에서는 유가적인 전통사상을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태산(泰山)
[각주:1]  곡부(曲阜)[각주:2]의 제례 등을 위해 우리나라 학자들을 대거 초대하여 배워나가는 실정에 처해있다. 모택동은 세계를 향한 철의 장막정책으로 집권할 때 청년(홍위병)들을 선동하여 문화대혁명이 일으켜 중국의 많은 문화 유적, 전통 문화유산, 학문 서적을 소각하여 없애 버리는 진시황을 닮은 행위를 일삼았다.


이때, 의식있는 저명한
 학자들은 물론 어지간한 지식인들 까지 자아비판에 올려졌고 귀향살이 시키듯 시골 소도시로 보내어 모택동 스스로 권력욕을 불태웠다. 전통 사상과의 결별을 외치며 해방 의식에 젖어지냈던 지나친 행위로 인해 잃어버린 문화 유산을 회복시키기 위해  중국 정부는 재건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잃어버린 춘추전국시대때 부터 꽃피워 내려온 제자백가의 철학사상과 전통문화를 재건 하려는 일환 중 한 방편으로 우리나라에서 역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인들은 모택동(毛澤東 Mao Zedong 1893. 12. 26 ~ 1976. 9. 9)이 문화 대혁명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하고 전통문화 유산을 잃어버린 잘못은 30% 일뿐 그가 국민에게 베푼 은덕은 70%라고 이구동성 입을 모아 말하는것은 다음의 신분상승이라는 요인에 의한 것이다.

1. 서구세력:  내정간섭하며 자국내 경제적 이권을 착취해 가는 서구 및 구미세력을 몰아내었다.

2. 부녀자: 남녀가 대등한 인권의식을 지니고 생활할 수 있게 되어 여성의 입지가 상승되었다.

3. 어린이: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인 노동력 가계 제도에서 어린이는 약자로 보호받게 되었다. 

3. 농부: 착취하는 지주들에게서 자유로워져 고리대금에 시달리지 않게 되고 자급자족하게 되었다.

4. 노동자: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게 되었고 정당한 보수를 받게되었고 신분상 신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5. 일반시민: 신분계급(양반, 평민, 하인)이 타파되었고 경제적으로 대등하게 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1. 태산(泰山) :중국 산동성(山東省) 중부에 위치한다. 태산은 높이 1,532m, 총면적 426㎢인 산으로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이다. 역대 황제들이 하늘의 뜻을 받는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했던 곳으로 BC 219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漢)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제왕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 무제는 5번, 청(淸) 건륭제(乾隆帝)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봉선의식을 치렀던 대묘(岱廟)와 유서 깊은 사당과 사찰, 정자, 비석 등이 있다. [본문으로]
  2. 곡부(曲阜): 산동성(山東省) 제녕(濟寧) 북동부에 위치하는 공자가 탄생한 도시이다. 주(周)대 초기에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 다스린 노(魯)나라 옛 도시. 북쪽 1km 지점에 공자의 무덤 공림(孔林)과, 공자의 집 유적으로 대규모의 문묘(文廟)가 세워져있어 예로부터 예교(禮敎)의 중심이 되었다.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및 안묘(顔廟), 주공묘(周公廟), 소호능(少昊陵: 中國金字塔)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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