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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오경(四書五經) 1. 사서(四書) 4) 중용(中庸) 본문

사서오경(四書五經)

사서오경(四書五經) 1. 사서(四書) 4) 중용(中庸)

성지 2013. 4. 8. 22:37

 사서오경(四書五經) 1. 사서(四書) 4) 중용(中庸)


 사서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중용(中庸) 올려봅니다. ^^*

 공자 문도의 집대성으로 간주되는

심경(心經)》도 상당히 좋아해서
 하단에 
심경(心經)의 내용을
 덧붙여 소개해드립니다.^^



- 도산 서원 상덕사 정문 -



1. 사서(四書)

4)중용(中庸)[각주:1]


사서를 배울 때 우선 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를 공부한 후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초학자들이중용(中庸)을 읽고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문구로 되어있다. 주자가 지은중용장구(中庸章句)》의 초입에 중용(中庸) ()’이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람이 없는 것의 이름이요, ‘()’은 평상(平常)이다.(中者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庸平常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중용(中庸)예기(禮記)49편중에서 31편에 수록되어 있었다.중용(中庸)을 지은이는 사마천의사기(史記) · 공자세가(孔子世家)정현(鄭玄)[각주:2]이 지은삼례목록(三禮目錄)등에 의하면 중용(中庸)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한다. 송나라 시대의 정자(程子)[각주:3]와 주자(朱子)[각주:4]를 통하여 사서(四書)의 하나로 정해졌고 주자가중용장구(中庸章句)를 지은 계기로 인해중용은 그 위치를 확립하게 된다.  그렇지만 중용에는 자사나 그 제자의 손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보는 고증학적인 견해도 많다.


주자의중용장구중용(中庸)33장으로 나누어 놓은 것으로 그 가운데 제1장은 공자(孔子)의 말씀이 증자(曾子)를 거쳐 자사(子思)에게 전해진 것을 자사가 적은 것이고 나머지 32장은 자사가 제1장의 의미를 해설한 것을 그의 제자가 기록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중용(中庸)33장의 구성내용에 따라 다시 분석하여 크게 분절을 나누는 작업이 이루어져 내려왔다.


중용(中庸)의 특성은 유교적인 형이상학과 철학적 근본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중용1장에서 보여준 천명(天命) · () · () · ()의 개념은 인간행위의 정당성과 근원성을 지고의 천명(天命)이 내재된 인성(人性)’에서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인성(人性)과 천명(天命)과의 관계인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에 관한 구조적인 연관성을 밝혀주고 있다.


또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감정이 발현되기 이전의()과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를 천하의 대본(大本)’달도(達道)’로 규정하여 우주의 질서와 만물의 배양이()()의 실현으로 가능하다고 확인한다. 여기서중화(中和)또는중용(中庸)의 원리가 본체와 현상을 통합하는 체용론(體用論)의 논리로 들어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에 대한 논의가중용장구21장에서부터 중심문제로 부각된다. “참됨은 하늘의 길이요, 참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2018)”라고 하여 참됨을 통한 하늘과 인간의 일관된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사물의 시작과 끝(物之終始)’이라 하여 존재의 근거로 확인하고, ‘자기를 이룰 뿐만 아니라 사물을 이루는 것(非自成己而己也, 所以成物也)’이라고 하여 주객합일(主客合一) 내지 내외합일(內外合一)의 원리임을 밝혀주며 신과 같다(至誠與神)’라 하여 성()을 취득함으로 얻는 신비성을 논했다.


중용(中庸)에는 귀신, 또는 신()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약용(丁若鏞)[각주:5]은 중용16장의 귀신의 개념을 상제(上帝, 하느님)의 의미로 이해하였고 제1장에서 보이지 않는 곳들리지 않는 곳은 상제가 강림하여 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여중용에 담긴 종교적인 신념 내지 신비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중용을 주석한 대표적인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주자(朱子)중용장구(中庸章句)》,《중용혹문(中庸或問)
송대 여립무(黎立武)[각주:6]중용지귀(中庸指歸)
청대 이광지(李光地)[각주:7]중용장단(中庸章段)
강유위(姜有爲)[각주:8]中庸注

우리나라의 이언적(李彦廸)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이익(李瀷)[각주:9]중용질서(中庸疾書)

정약용(丁若鏞)중용자잠(中庸自箴),중용강의(中庸講義)등이 있다.


주자가 지은중용장구(中庸章句)의 구성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독중용법(讀中庸法), 중용장구(中庸章句),  1~ 33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심경(心經)[각주:10]



심경(心經)》원문을 읽으면 심경(心經)》이 마음을 다스리는 글이라는 뜻의 의미를 더욱 되새길 수 있게 된다.심경(心經)》은 남송시대 주자학파 서산(書算) 진덕수(眞德秀)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수록된 내용은 먼저 경전에서 발췌한 것으로《서경(1장) ·시경(2·역경(5) ·논어(2) ·중용(2) ·대학(2) ·예기악기(樂記)(3) ·맹자(12)29장이 실려 있고 그 다음에


송대 도학자들
 글들 - 주돈이(周敦頤)의 『양심설 養心說과 통서(通書)· 성가학장(聖可學章),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범준(范浚)의 심잠(心箴),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구방심재잠(求放心齋箴)·존덕성재잠(尊德性齋箴)』들인 7편이 실려 있어서 어느 종교의 경전 못지 않은 숙연함을 안겨주어 읽는이를 감동케 한다.[각주:11]



- 심학도(心學圖) -


  1. 참고문헌:《경서강독》p127~128.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부 1998.《대학중용집주》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본문으로]
  2. 정현(鄭玄 127 ~ 200), 자 강성(康成). 북해(北海 山東省) 고밀(高密) 출생. 시종 재야(在野)의 학자로 지냈다.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訓詁學)·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을 갖췄다. 처음 향색부(鄕嗇夫)라는 지방의 말단관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낙양(洛陽)으로 가서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

    그 후 마융(馬融) 등에게 사사하여,《역(易)》《서(書)》《춘추(春秋)》등의 고전을 배운 뒤 40세가 넘어서 귀향하였다. 그가 낙양을 떠날 때 ‘나의 학문이 정현과 함께 동쪽으로 떠나는구나.’라고 탄식하였을 만큼 학문에 힘을 쏟았다. 귀향 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가르쳤으나, 44세 때에 환관들이 학자 등 반대당을 금고 한 ‘당고(黨錮)의 화’를 입고, 집안에 칩거하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는 고문·금문에 모두 정통하였으며, 가장 옳다고 믿는 설을 취하여《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논어(論語)》《효경(孝經)》등 경서의 주석을 하였고,《의례》《논어》교과서의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또 하휴(何休)가《공양묵수(公羊墨守)》《좌씨고황(左氏膏肓)》《곡량폐질(穀梁廢疾)》의 3부작을 펴내자, 그는《발묵수(發墨守)》《침고황(鍼膏肓)》《기폐질(起廢疾)》의 3부작을 지어 반박함으로써 하휴를 경복시켰다.

    그의 저서 중 완전하게 현존하는 것은《모시》의 전(箋)과《주례》《의례》《예기》의 주해뿐이고, 그 밖의 것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그 잔여부분은 청나라 원균(袁鈞)의 《정씨일서(鄭氏佚書)》에 실렸다. 또 그의 《논어》 주석의 일부가 근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의 당나라 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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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정자(程子), 송(宋)대 정명도(程明道;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1033~1107) 두 형제를 말한다. 모두 유교철학자 주염계(周簾溪)에게서 배워 ‘이(理)’를 최고의 범주로 삼아 도학(道學)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이들은 하늘(天)을 ‘이(理)’라고 하여 달이 냇물에 그 모습이 비치듯이 천하 만물은 이 유일하고 절대인 이(理)를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천리(天理)가 일정한 목적 하에 우주의 질서를 세운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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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주자(朱子): 주희(朱熹: 1093-1163), 중국 남송(南宋)시대의 이학(理學)의 대가. 자(字)가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유가(儒家) 경전을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식견과 수양이 높은 문인들과 두루 교류하였다. 배울 수 있는 학문수양을 지닌 스승이 있다고 느끼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가 배우는 성실함으로 일관했다.

    이학의 거두인 주렴계(周濂溪: 敦頤 1017-1073), 소강절(邵康節: 雍 1011-1077), 장횡거(張橫渠: 1020-1077), 이정(二程)의 철학사상을 집대성하여 남송 이학(理學)을 완성한 도학자(주자학)가 되었다. 그의 철학사상은 장기간 많은 추종자들이 탐구하였고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끼쳐 이조시대의 학자들의 학문적인 근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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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기의 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다.

    저서는 500여 편이 있다.《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안에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마과회통(麻科會通)》,《모시강의(毛詩講義)》,《매씨서평(梅氏書平)》,《상서고훈(尙書古訓)》,《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상례사전(喪禮四箋)》,《사례가식(四禮家式)》,《악서고존(樂書孤存)》,《주역심전(周易心箋)》,《역학제언(易學諸言)》,《춘추고징(春秋考徵)》,《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맹자요의(孟子要義)》등이 실려 있다. 대표관직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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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여립무(黎立武), 출생 사망년도 불명, 남송 임강(臨江, 강서성) 신유(新喩) 사람. 자는 이상(以常)이고, 호는 원중자(元中子) 또는 기옹(寄翁), 소기선생(所寄先生)이다. 문천상(文天祥), 사방득(謝枋得)과 교유했다. 도종(度宗) 함순(咸淳) 4년(1268) 진사(進士)가 되고, 태학록(太學祿)과 원주통판(袁州通判), 국자사업(國子司業), 문화각대제(文華閣待制) 등을 지냈다. 송나라가 망하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나이 68살로 죽었다. 정이(程頤)의 문인 곽충효(郭忠孝)에게 수학하여 그의 학문을 계승했다. 일찍이 금봉서원(金鳳書院)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저서로는《중용지귀(中庸指歸)》,《중용분장(中庸分章)》,《대학발미(大學發微)》,《대학본지(大學本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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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광지(李光地 1642 ~ 1718), 청나라 복건(福建) 안계(安溪) 사람. 자는 진경(晉卿), 호는 용촌(榕村) 또는 후암(厚庵)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강희(康熙) 9년(1670) 진사(進士)가 되었다. 경학(經學)과 악률(樂律), 역산(曆算), 음운(音韻) 등에 정통했다.

    황제의 칙명으로《성리정의(性理精義)》와《주자대전(朱子大全》등을 편수했다. 정주학(程朱學)을 추숭하여 강희제의 신임으로 청나라 초기 주자학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지만,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여 육구연, 왕양명학파도 배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조망(全祖望) 같은 학자는 그가 율려(律呂)나 역산, 음운에만 밝았지 나머지 분야는 부족했다고 평했다. 근래의 평가도 정주학에 기대 관직에만 연연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저서는《주역관전(周易觀彖)》과《주역통론(周易通論》,《상서해의(尙書解義)》,《효경전주(孝經全注)》,《대학고본설(大學古本說》,《중용여론(中庸餘論)》,《논어맹자차기(論語孟子箚記)》,《이정유서(二程遺書)》,《주자어류사찬(朱子語類四纂)》,《홍범설(洪範說)》,《고악경(古樂經)》,《용촌전집(榕村全集)》,《용촌어록(榕村語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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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강유위(姜有爲 1858~ 1927): 광동성 남해인. 자는 광하(廣廈), 호 장소(長素), 갱생(更生), 초명 조이(祖貽), 별명 남해선생(南海先生). 중국 청말의 정치가이자 서예가였다. 요평(寥平)에게 공양(公羊)학을 배워 대성했다.

    강유위는 유가경전의 권위를 이용하여 제도개혁을 주장했는데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것이 당시 중국을 구제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강유위는 이와 같은 골자의 주장을, 북경에 회시를 보러 모인 거인들의 서명을 받아 광서제에게 상소로 올렸으며, 결국 광서제가 강유위와 함께 도모한 개혁이 1898년의 무술변법운동(戊戌變法運動)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중국의 패배로 인해 중국은 새로운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는데 그 시대적 임무를 떠안고 등장한 것이 강유위가 주도하는 변법파였다. 양계초는 강유위를 도와 변법운동의 중앙에 서서, 1895년부터 변법을 추진하는 거인들의 모임인 강학회(强學會)의 서기가 되어 활동했으며, 1896년에는《시무보(時務報)》라는 잡지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변법을 설명하고 선전하는 글《변법통의(變法通議)》를 연재했다.

    그러나 1898년 광서제의 결단에 의해 탄생한 변법정부는 서태후를 필두로 하는 보수파의 반격으로 100일 만에 무너져 강유위는 실각하였다. 일본, 미국등지에서 망명생활을 보내고 귀국한 후 공서제복벽(復辟)운동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청도에서 병사했다.

    저서는《신학위경고(新學僞警告)》등이 있으며, 특히《광예주쌍접(廣藝舟雙楫)》은 완원(阮元), 포세신(包世臣)의 비(碑)학창도를 확대보강한 저술이다. 그는 비학파의 이론적 지도자였으며 서는 행초가 패기가 있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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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이익(李瀷 1681~1763) 조선 후기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 자신(子新), 호 성호(星湖). 그의 학문은 성리학(性理學)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츰 경직화된 학풍에서 벗어나 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반계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심취하였고,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지리, 율산(律算), 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다.

    이러한 관심분야는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西學書)들을 접하면서 더욱 영역이 확대되고 깊이가 심화되었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서 채용하는 공거제(貢擧制)를 함께 실시할 것과 병역문제는 향병제(鄕兵制)를 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기의 개발과 군마(軍馬) 양성, 성지수축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등 여려 방면에 걸친 일대 혁신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손으로 종자(從子)인 이병휴(李秉休)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 이가환 등으로 이어졌고, 문인으로는 안정복(安鼎福) · 윤동규(尹東奎) · 신후담(愼後聃) · 권철신(權哲身) ·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저서는《성호사설》과 《곽우록》이외에《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서삼경》,《근사록(近史錄)》등이 있고, 편저에《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자복편(自卜編)》,《관물편(觀物編)》,《백언해(百諺解)》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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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심경(心經)》학민출판사, 《심경부주(心經附註)》전통문화연구회, 역주 성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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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심경(心經)》은 우리 나라에 16세기 중엽인 중종 말, 명종 초에 김안국(金安國)이 이를 존숭하여 그의 문인 허충길(許忠吉)에게 전수한 데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심경(心經)》을 가장 중요시한 학자는 이황(李滉)이다. 이황은 젊어서 이 책을 서울에서 구해보고 깊이 연구한 뒤에, “나는 《심경(心經)》을 얻은 뒤로 비로소 심학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믿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알았고, 이 책을 공경하기를 엄한 아버지같이 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의 기록에 따르면, 1561년(명종 16) 겨울 스승 이황을 모시고 있을 때 이황은 새벽마다 《심경부주》를 한 차례 독송하였다 한다. 이황은 1566년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지어서 《심경》의 비중을 사서와 《근사록》에 못지 않게 존숭함을 밝히고, 정민정의《심경부주》와 관련, 작자인 정민정의 인물됨에 관한 논난을 변론하고《심경부주》의 내용에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이 섞여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변론하였다.

    여기에서 이황은 명나라의 진건(陳建)이 정민정의 학풍에 주희와 육구연의 입장을 뒤섞으려는 태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적어도 《심경부주》는 도학의 정통성에서 문제가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황의 제자 황준량(黃俊良)은 “진덕수는 실상이 없고, 범준은 절실하지 못하며, 황간(黃幹 : 주자의 제자)의 소견은 두 사람보다 더욱 떨어지고, 정민정은 식견이 밝지 못하고 채택이 정밀하지 못하다”라 하여 《심경》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이황은 적극적으로 변론하였다.

    이황은 《소학》·《근사록》·《심경》가운데 초학자가 처음 공부하는 자리에서는 《심경》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만년까지 《심경》을 강의하여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까지도 계속하였다.

    1794년(정조 18) 왕은 권벌(權橃)의 《근사록》수진본(袖珍本)이 전해진 것을 보고 채제공(蔡濟恭)으로 하여금 어제(御製) 서문을 짓게 하면서, 전날 즉위하기 전에 보았던 이황이 직접 교정한 《심경》 수진본을 들어 말하였다. 여기에서 정조는 이 두 수진본의 사실이 유사할 뿐 아니라 이 두 책은 겉과 속의 관계나 수레의 두 바퀴 또는 새의 두 날개처럼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모각(模刻)한 《심경》은 ≪심경부주≫로서 <어제근사록서 御製近思錄序>와 정조의 연설(筵說)을 첫 머리에 싣고 있으며, 본문 바로 앞에 원나라 정복심(程復心)의 <심학도 心學圖>와 <심학도설 心學圖說>을 싣고 있다. 정복심은 이 <심학도>에서 심(心)을 한 몸의 주재라 하고, 경(敬)을 한 마음의 주재라 하여, 두 개의 중심 개념으로 제시하며, 《심경》의 전체 정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지은 《심경》에 관한 저술은 9종이나 된다. 곧, 이덕홍(李德弘)의 《심경질의(心經質疑)》(1권), 조호익(曺好益)의《심경질의》(1권), 이함형(李咸亨)의 《심경표제 心經標題》(2권) ·《심경질의부주 心經質疑附註》(1권), 이황의 《심경석의(心經釋義)》(1권)·《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0》(2권), 정구(鄭逑)의《심경발휘(心經發揮)》(2권), 박세채(朴世采)의 《심경요해(心經要解)》(2권), 주세붕(周世鵬)의《심경심학도(心經心學圖)》(1권)이다.

    여기에서 이덕홍·조호익·이함형·정구는 이황의 제자다. 따라서 9종 중에서 7종이 이황과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황의 ≪심경≫에 대한 존숭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심경≫에 관한 조선 후기 도학자들의 관심은 매우 높아서 많은 저술이 남아 있다. 조목(趙穆)의 <심경품질 心經稟質>, 이만부(李萬敷)의 <심경속설 心經續說>, 이원조(李源祚)의 <심경강의 心經講義>, 김병종(金秉宗)의 ≪성학속도≫·<제9심경찬도 第九心經贊圖> 등 영남학파의 저술뿐만 아니라, 한원진(韓元震)의 <심경부주차의 心經附註箚義>, 정호(鄭澔)의 <심경편말오씨설후변 心經篇末吳氏說後辨>, 이항로(李恒老)의 <심경부주기의 心經附註記疑> 등 기호학파의 저술도 상당수 있다.

    또한,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은《심경밀험(心經密驗)》(1권)을 저술하여 《소학》이 밖을 다스리는 데 비하여 《심경》은 속을 다스리는 것으로 대응시키며 자신이 경전을 연구한 것을 《심경》으로 귀결시키겠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저술에서 자신의 심성론적 견해에 따라 주자학의 심성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분석을 제시하였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양명학자인 정제두(鄭齊斗)가《심경집의(心經集義)》(2권)를 저술하여 주자학과 육왕학(陸王學)을 통합하는 체계를 시도하였다. 그는 정민정의 《심경부주》를 모방하면서 그의 체계가 주자학에 기울어져, 지루하고 번잡함을 극복하려 한다는 양명학적 입장의 《심경》을 제시한 것이다. 최근에는 《심경》과 《근사록》을 합쳐서 영인한 판이 두 종류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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