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오경(四書五經) 1. 사서(四書) 3) 맹자(孟子)

예로부터 가을은

등화가친의 계절이라고 하죠?

이 가을에는 뜻을 함께 하는

벗들과 만나 좋은 책을 고른 후


함께 읽고 토론하면서 차 한잔 마시며

삶의 이상을 나누는 우정을 다짐한다면

마음이 상당히 풍요로워 질거예요. ^^ 


제가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에서

사서(四書) -  3. '맹자(孟子)'인데

원서를 번역하여 읽는 재미로
행복을 만끽했었던 기억들이
가을의 문턱에서 번져오네요.


번역서를 읽으며 서로 우정을

나누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 서울 문묘 - 




사서오경(四書五經)
 

1.사서(四書)3)맹자(孟子)[각주:1]



   맹자(孟子 BC372 ~ BC289)의 이름은 ()’이고 자()자여(子輿)’이다. 그의 신상에 관해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한나라 사마천의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이 있고 (대의 적자기(狄子奇)의 저술가운데에맹자편년(孟子編年)[각주:2]이 있다. 맹자는 BC37242일 추()나라,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연주부(兗州府) 추현(鄒縣) 남쪽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친이 타계하여서 어머니가 맹자가 어릴 때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하였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춘추시대에 공자가 수레를 타고 철환천하했던 것처럼 맹자도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살면서 여러 제후들을 찾아 자신의 정치적 이상(理想)을 실현해 보려 하였다.  그는 여러 나라에 유세를 다녀 온 천하에 그의 명성이 알려졌는데, 늘상 뒤에 수십 승의 수레를 따르게 하고 수백 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다녔다고 한다.  맹자(孟子)는 당시 제후들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혁명논적인 사상을 주장하여,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려는 자들과 통치자들에게, 혼란한 시대에 걸맞지도 않고 이해득실에 상반되는 논리라고 여겨져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맹자의 문장은 호기(浩氣)가 넘쳐나고 시종 인의(仁義)를 강조하며,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여 지칠 줄 모르는 의기를 지니고 있다사마천은사기(史記)》에서 그의 신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경전이 없어져가고 예의제도가 무너져가는 현실을 걱정하여, 제자인 만장, 공손추 등과 함께시경(詩經)서경(書經)을 정리하고, 공자의 뜻에 따른 것이며 또한 자신의 신념을 담은맹자(孟子)7편을 저술하고 84세로 일생을 마쳤다고 하였다.



맹자(孟子)7편을 통해서 보이는 맹자의 제자는 도합 14명인데 그중 노()나라 사람인 악정자(樂正子), 제나라 사람인 공손추(公孫丑)와 만장(萬章)이 가장 유명하다예로부터 전해져 온맹자(孟子)7편에 대한 저작설은 세 가지 설이 주장되어 왔다.


첫째. 맹자 자신이 직접 저술한 책이다.
후한시대에 활약한 조기(趙岐 106~201)[각주:3]맹자제사(孟子題辭)의 주장은 송대에 이르러 문장을 박력있게 이어가는 일관성을 보아 맹자 자신의 저술이다라고 말한 주희(朱熹 1130~1200)[각주:4]와 청대 염약거(閻若據 1636~1704)[각주:5]와 같은 학자들이 지지하여 논거를 심화시켰다.[각주:6]


둘째. 맹자가 지은 것이 아니라 맹자가 죽은 뒤에 그의 제자 만장
(萬章), 공손추(公孫丑)의 문하에서 기록한 것이다.
()대 임신사(林愼思)와 한유(韓愈 768~824)[각주:7], 장적(張籍 765?~830?)[각주:8]에 이어 송()대의 소철(蘇轍 1039~1112)[각주:9], 조공무(晁公武)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각주:10]의 주장, 청대에 이르러 최술(崔述 1740~1816)[각주:11]맹자사실록(孟子事實錄)이 있다.


셋째. 《
맹자(孟子)는 주로 맹자 자신이 쓴 글들 이지만 제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고 또 제자들이 쓴 글도 섞여있다.
사마천이사기(史記)에서 물러나서는 만장(萬章)의 무리들과 함께시경(詩經)서경(書經)을 정리하고, 공자의 뜻을 계승해서맹자(孟子)7편을 지었다고 한 기록이 그 주장의 근거이다.


맹자가 자라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에게 학문을 전수받았다는사기(史記)의 기록과 직접 자사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하는 조기(趙岐)맹자제사(孟子題辭)의 글이 있지만 아주 확실하지는 않다. 맹자 스스로 소원은 배우는 것이다라고 한 말 처럼 젊어서 학문을 닦아 제자 교육에 전념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여러나라의 군주들에게 가서 유세를 하였다.  또한 그는  “세상에 공자만한 인물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공자에 대한 지극히 존숭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위의 견해 중에서 셋째 번 주장이 합리적인 견해라고 생각되어 찬동하는 학자들이 가장 많다.맹자(孟子)는 한()대의 사마천(司馬遷), 양웅(揚雄 BC53 ~ 18)[각주:12], 조기(趙岐), ()대의 한유(韓愈)에 의해 존중 되었지만맹자(孟子)를 비판한 학자들은 매우 많았다. 



왕충(王充 27 ~ 100)[각주:13]논형(論衡)-자맹(刺孟), 사마광(司馬光 1019 ~ 1086)[각주:14]의맹(疑孟), 이구(李覯)상어(常語), 조설지(晁說之)저맹(詆孟), 풍체(馮體)산맹(刪孟), 정원상의예원절충(藝園折衷), 소식(蘇軾)논어설(論語說)등은 비판한 문헌들이다.  특히 이구(李覯)는 맹자를 차마 못할 일을 하는 사람(忍人)’이라고 비난하였다.



()대에 이르자 여윤문(余允文)존맹변(尊孟辨)을 지어 맹자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고 주희는독여은지존맹변(讀余隱之尊孟辨)을 지어 여윤문의 맹자에 대한 변호를 더욱 강화하였다.  공자를 지성(至聖), 맹자는 아성(亞聖)으로 높여 부르는 것은 공자가 지극히 위대한 성인임에 비하여 맹자는 그 다음가는 위대한 성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호칭으로 맹자는 증자(曾子)와 자사(子思)에 이어 유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학자로 공인되고 있다.



맹자(孟子)의 핵심적인 문제는 왕도정치론과 함께 인간성품이 본연적 선()함을 확인하는 성선론(性善論)’이다. 그는 성품의 선한 성격을 확인하기 위하여 인간 마음의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사단심(四端心)[각주:15]을 제시하였고 여기에 상응하는 인`(···)의 사덕(四德)을 드러냄으로써 이후 송대 성리학의 인성론의 기본 체계를 제공해주었다.



맹자(孟子)는 본래 순자(荀子)와 더불어 자부(子部)인 제자류(諸子類)에 들어 있었으나 송나라 진종 때에 손석(孫奭)에게 명하여맹자음의(孟子音義)를 간행케 하였는데 이로서 진진손(陳振孫)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서 종래에 자부(子婦)에 들어있던맹자(孟子)를 경부(經部)로 끌어올린 것이다



여기에 정자(程子)대학(大學),논어(論語),중용(中庸)과 더불어맹자(孟子)를 사서(四書)로 열거하였고 이에 주자가사서집주(四書集注)를 지음에 따라맹자(孟子)의 위치는 경서로서 확고한 지위를 지니게 되었다



- 도산 서원 -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둘러앉아 읽으면  따듯하고 촉촉한 감정이 전해질  김학주교수님의 신완역 맹자(孟子)》를 소개합니다. 



  신완역(新完譯)맹자(孟子)[각주:16]



- 차례 - 

 

서문(序文)

일러두기

맹자(孟子) 해제(解題)

 

1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2.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2

3.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4.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3

5. 등문공장구(滕文公章句)

6. 등문공장구(滕文公章句)

 

4

7. 이루장구(離婁章句)

8. 이루장구(離婁章句)

 

5

9. 만장장구(萬章章句)

10. 만장장구(萬章章句)

 

6

11. 고자장구(告子章句)

12. 고자장구(告子章句)

 

7

13. 진심장구(盡心章句)

14. 진심장구(盡心章句)

 

색인(索引)

 







다음 - 사서오경(四書五經) 1. 사서(四書) 중  4) 중용(中庸-  계속


  1. [참조]《맹자(孟子)》김학주(金學主) 역저(譯著) - 명문당 -, 《경서강독(經書講讀)》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본문으로]
  2. 《맹자집주(孟子集註)》성백효, 전통문화연구회 p448 [본문으로]
  3. 후한시대의 활약한 조기(趙岐)는 『맹자』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 작업을 통해 7편을 상하로 나누어 14편으로 만들었는데, 지금도 이 체재가 보편화되어 있다. [본문으로]
  4. 송대에 이르러 주희(朱熹)는 조기가 훈고(訓詁)에 치중해 맹자의 깊은 뜻을 놓쳤다고 비판하고, 성리학의 관점에서 《맹자집주(孟子集註)》를 지었다. 이 책은 조기의 고주(古註)에 대해 신주(新註)라고 한다. 주자학이 관학(官學)으로 채택된 원대 이래 공식적인 해석서로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본문으로]
  5. 청대(淸代)에 이르러 명(明)나라에 대한 반동(反動)으로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위한 '고증학(考證學)'이 출현하였는데 황종희(黃宗義) • 고염무(顧炎武) • 염약거(閻若據) 등이 중요인물이다. 염약거의 자(字)는 백시잠구(百詩潜邱). 꾸준한 노력을 통해 유학을 연구하여 만년에 세종ㆍ옹세제(雍世帝)의 후대를 받았다. 《고문상서소증(古文尚書疏證)》을 발표하여 《고문상서》 및 《공안국전주(孔安國傳註)》가 동진(東晋) 때의 위작(僞作)으로 한(漢) 초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단정하여 청대 고증학(考證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본문으로]
  6. 우리나라에 유학의 전래와 함께 『맹자』도 같이 유포되었지만, 고려 말까지는 육경 중심과 사장학적(詞章學的) 경향에 밀려 『논어』나 『문선(文選)』 등의 다른 경전에 비해 소홀히 취급되었다. 문장보다 인격을, 육경보다 사서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주자학이 도입되어 자리를 굳히면서 『맹자』는 지식인들의 필수 교양서로 부상되었고, 주희의 주석서가 해석의 정통적 기준이 되었다.
    맹자사상의 일관된 핵심은 '성선설'과 '혁명론'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이 활발한 논란을 거쳐 배타적 권위를 형성하는 17세기 말까지 '성선설'에만 국한되었다.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으로부터 비롯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조선조 후반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는 입론(立論)의 근거를 주희의 주석에서만 구함으로써 200여 년 동안 해결을 보지 못했다.
    주희의 경전 해석과 그 바탕에 깔린 세계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낙인찍히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맹자질서(孟子疾書)』에서 맹자가 양혜왕에게 “이익을 앞세우지 말라.”고 한 것은 이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의 조화를 꾀하자는 데 그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주자학의 비현실적인 명분론과 의리론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맹자는 백가(百家)가 다투어 각기 다른 사상을 주장하던 전국시대에 의연하게 공자사상을 옹호하고, 이를 한층 진전시켰다. [본문으로]
  7. 당대 중기의 문인이자 사상가이다. 자는 퇴지(退之)이며 선조가 창려(昌黎) 출신이므로 한창려라고도 했다.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3세에 고아가 되어 형수의 손에서 자랐다. 어려운 환경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유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25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경조윤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시랑에 이르렀으며 57세로 생을 마쳤다. 조정에서 예부상서의 관작과 함께 문(文)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여 한문공(韓文公)으로 불리웠다.
    사상적으로는 도가와 불가를 배척하고 유가의 정통성을 적극 옹호ㆍ선양했다. 그의 시는 300여 수가 남아 있는데 독특한 표현을 추구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문장에 있어서는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고문운동을 주도, 산문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머리를 차지하였다. 사위이자 문인인 이한이 한유의 사후에 그의 시문을 모아《창려선생집》을 간행한 것이 전해진다.
    [본문으로]
  8. 강소송(江蘇省) 소주(蘇州)사람이며 자는 문창(文昌)이다. 시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두보(杜甫)와 백거이(白居易)의 연계적인 위치에 있는 시인이다. 곤궁한 가정에서 태어나 높은 벼슬에 오르지도 못했다. 한유(韓愈)의 추천으로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으나, 눈이 멀어 태상시태축(太常侍太祝)이라는 낮은 벼슬로 가난하게 살았다. 눈이 먼 그는 자기 속의 불만을 시로 표현하면서, 두보를 좋아하여 그를 닮으려 노력하였다. 특히 전쟁의 비정함과 전란 속에 겪는 백성들의 고난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내었다. 악부체의 시를 썼으나 5언 율시도 잘 지었다. 지금 전해지는 시 418수 중 7,80수가 악부시여서 서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악부시가 아닌 것도 대부분 민간의 고통을 반영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부원(征婦怨)》 《축성사(築城詞)》 《야로가(野老歌)》 《이부(離婦)》 《성도곡(成都曲)》 《서주(西州)》 《산농사(山農詞)》 《가악부(賈樂府)》 《장군행(將軍行)》 《목동사(牧童詞)》 《정서장(征西將)》 등의 작품을 통해 봉건 통치계급들이 농민에게 가져다 준 고통을 폭로하고 고난에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동정을 나타내고 있다. [본문으로]
  9. 자(字)는 자유(子由). 호 난성(欒城)이다. 미산현(眉山縣 사천성 남쪽에 있던 현)에서 출생. 소순(蘇洵)의 아들이다. 19세 때 형 소식(蘇軾:東坡)과 함께 진사시험에 급제, 정계로 진출했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지방관리로 좌천되었다.
    철종(哲宗) 때 구법당(舊法黨)이 정권을 잡자 우사간(右司諫)·상서우승(尙書右丞)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신법당에 의하여 광둥성[廣東省] 레이저우[雷州]로 귀양갔고, 사면된 후에는 허난성[河南省]의 예창(穎昌)으로 은퇴하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시문 외에도 많은 고전의 주석서(注釋書)와 《난성집(欒城集)》(84권) 《난성응소집(欒城應詔集)》 《시전(詩傳)》 《춘추집전(春秋集傳)》 《고사(古史)》 등의 저서가 있다. [본문으로]
  10. 조공무(晁公武) 자는 자지(子止), 소덕선생(昭德先生)이라 불렸다. 송(宋) 소흥(小興) 2년에 진사(進士)가 되어 초임으로 사천성(四川省) 관리가 되었다. 당시 사천 전운사(轉運使)로 있던 정도(井度)가 이 지방이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 귀한 서적이 많이 남아 있어 10여 년간 책을 모았는데, 조공무의 호학(好學)에 감탄하여 전부 양도하였다. 이것을 조공무가 임지(任地)의 군재(軍齋 관아)에서 해설서를 펴내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부로 분류하여 부(部)와 류(類)의 첫머리에 서문을 붙여 책마다 권수, 저자의 약력, 내용의 개요 등을 적었다.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으나,《칠략(七略)》의 체재를 본받은 중요한 해설서로《문헌통고(文獻通考)》의 경적고(經籍考)는 이 책을 취택하였다. 원서(原書) 4권 출판 후 두 계통으로 나뉘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문인(門人) 요응적(姚應績)이 가장(家藏)했던 책을 보태어 중편(重編)한 20권으로서 구주본(衢州本)이라하며, 다른 하나는 원서 4권에 송(宋)나라의 왕족 조희변(趙希辨)이 가편집한 것을 추가하여 편찬한 《부지(附志)》1권과 요씨(姚氏)의 증가분을 따서 편찬한《후지(後志)》2권을 합쳐 만든 것으로 원주본(袁州本)이라고 한다. 양쪽 모두 통행본(通行本)에는 오류가 있어서 우열론이 분분했으나, 왕선겸(王先謙)이 구주본에 양쪽 것을 참조하여 만든《교보(校補)》(1권)를 덧붙여 간행한 것이 편리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어서 1933년에 송판 원주본(宋版袁州本)이 영인(影印)되어, 가장 신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참조: 두산백과] [본문으로]
  11. 청(淸)대 중기 사학자·고증학자이다. 자는 무승(武承). 호 동벽(東壁). 하북성(河北省) 대명(大名)에서 출생했다. 복건성([福建省)에서 지현(知縣)을 지낸 뒤, 향리로 돌아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고거학자(考據學者)이었으나 독자적, 합리적인 정신을 지니고 경서(經書)에 관한 한유(漢儒)의 주해를 믿지 않고, 또 경서 전반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특히《예기(禮記)》는 성인의 경(經)이 아니며,《주례(周禮)》를 잡서라고 하는 등, 대담하게 고대사실(古代史實)에 대한 재검토를 단행하였다. 그의 학설은 당시 거의 외면당하였으나 근래에 이르러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저서는 대표작《고신록(考信錄)》36권 외 30여 종이 있다. [본문으로]
  12. 전한 말기 학자겸 문인으로 자(字)는 자운(子雲)이다.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서 출생. 청년시절에 동향의 선배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작품을 통하여 배운 문장력을 인정받아, 성제(成帝) 때 궁정문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성제의 여행에 수행하며 쓴《감천부(甘泉賦)》《하동부(河東賦)》《우렵부(羽獵賦)》《장양부(長楊賦)》 등은 화려한 문장이면서도 성제의 사치를 꼬집는 풍자도 잊지 않았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원인을 묘사한《해조(解嘲)》《해난(解難)》도 독특한 여운을 주는 산문이다. 학자로서 각 지방의 언어를 집성한《방언(方言)》《역경(易經)》에 기본을 둔 철학서《태현경(太玄經)》과 《논어(論語)》의 문체를 모방한 수상록《법언(法言)》등을 저술하였다. 왕망(王莽)이 정권을 찬탈한 뒤 새 정권을 찬미하는 문장을 썼다. 송학(宋學) 이후에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그의 식견은 한(漢)나라를 대표하였다. [본문으로]
  13. 동한(東漢) 인으로 자는 중임(仲任), 회계군 상우현 출생. 왕충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훗날 경사(京師)에 가서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며 반표(班彪)에게 사사하였다. 빈한하여 집안에 책이 없어서 항상 낙양의 서점가를 돌아다니며 책을 읽었는데 한번 읽으면 바로 암기하여 마침내 백가의 학설을 두루 통달하였다. 왕충은 논설을 좋아하였는데 처음 들으면 괴이한 듯 하나 이치가 담겨 있었다. 소인배 유학자들이 글자에만 집착하여 진실을 잃었다고 여겼다. 이에 문을 닫아걸고 은거하며 생각에 깊이 잠겼다. 경조사에 참석치 않고 창문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집안 곳곳에 붓과 먹을 준비하여 두고《논형》85편 이십만 여 글자를 지어 사물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서술하면서 세속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교정하였다.
    자사(刺史) 벼슬을 하던 이에게 발탁되어 치중(治中) 벼슬을 맡았지만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친구 견이오가 상소를 올려 왕충이 재능과 학식이 출중하다고 추천하니 숙종(肅宗)이 특별히 가마를 내려 초빙하였으나 병이 들어 가지 못하였다. 나이 칠십에 이르러 기력이 쇠퇴하니『양성서(養性書)』 16편을 지으면서 욕심을 절제하고 정신을 배양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영원(永元)년에 병으로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본문으로]
  14. 북송(北宋) 때의 학자. 온공(溫公)이라 칭했다.《자치통감(資治通鑑)》의 편자이다. 이 책은 천자의 정치에 도움을 주기 위해 19년간 전국시대에서부터 편년체(編年體)역사를 편찬한 것으로, '대의명분' - 군신(君臣)의 의(義)를 명확히 한 것이다. 그는 한대(漢代)의 양웅(楊雄)을 가장 숭배하고, 그의 주석서인《태현주(太玄註)》, 《법언주(法言註)》, 양웅의 《태현(太玄)》을 본뜬 그의 저서 《잠허(潛虛)》에서 상수학(象數學)을 중심으로 한 천인상관(天人相關)의 철학을 남겼다. 그 가운데에서 '귀천빈부'(貴賤貧富)는 '천분'(天分)이고 '군명신충 부자자효'(君明臣忠 父慈子孝)는 '인분'(人分)이라고 하여, 이것을 거스르면 반드시 '천재'(天災)와 '인앙'(人殃)이 생긴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당시의 봉건제 질서를 '천명'(天命)이라 하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천명'에 근거하지 않은 '변법'을 단행한 강남의 신흥 지주파인 왕안석(1021~86)에 반대한 대지주파의 철학을 역설하였다. [본문으로]
  15. 사덕(四德)은 사단심(四端心), 사단설(四端說)
    - 측은지심(惻隱之心) : 남을 사랑하여 측은히 여기는 마음. 인(仁) - 사랑
    - 수오지심(羞惡之心) :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 의(義) - 정의
    - 사양지심(辭讓之心) :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 예(禮) - 질서
    - 시비지심(是非之心) :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지(智) - 지혜 [본문으로]
  16. 신완역(新完譯)《맹자(孟子)》김학주 역저(譯著) – 명문당 - [본문으로]
Posted by 聖枝: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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