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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강산참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 - 사인암에 놀러간 사람, 살던 사람 본문

한시(漢詩) & 사(詞)

사군강산참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 - 사인암에 놀러간 사람, 살던 사람

성지 2014. 5. 29. 20:48

- 여든일곱 번째 이야기
2014년 5월 29일 (목)
사인암에 놀러간 사람, 살던 사람

취한 듯 살다가 꿈꾸듯 죽는 인생 
나의 마음은 늘 슬프구나 
잠깐의 유람이나 평소 바라던 것
산골짜기를 다녀보았네 
우뚝하여라 바위 홀로 서 있는데 
사인암은 누구의 자취인가 
영롱하여라 세 겹의 절벽 
먹줄 놓은 듯 천 길이나 곧구나 
일곱 구비 맑디맑은 물 
한 웅덩이 푸른 옥거울 
반반한 돌은 상, 높은 돌은 베개 
하늘이 사람 누울 바위를 빌려주었네 
계곡 길 가마가 강의 배보다 나으니 
편안한 자세로 그윽이 경치를 감상하네

醉生至夢死
我心常慽慽
薄遊愜素願
杖履山之谷
巋然巖獨立
舍人誰事蹟
玲瓏三疊壁
繩墨千尋直
澄明七曲水
玉鏡一泓碧
床平復枕高
天借人臥石
溪輿勝江舟
安身放幽矚

조영경(趙榮慶, 1742~ 미상)
『사군강산참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국민대박물관소장)
 


  이 시는 1803년(순조3)에 제작된 서화첩 『사군강산참선수석』에 그림과 함께 수록된 작품이다. 그림을 그린 이는 기야(箕埜) 이방운(李邦運, 1761~1815)이고 발문을 쓴 사람은 우어 거사(寓於居士) 김양지(金養之)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조영경(趙榮慶)인데 자가 안숙(安叔)이다. 조영경은 1802년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중양절을 맞이하여 인근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 흥취와 견문을 시로 기록하고 당시 유명한 화가 이방운에게 그림을 의뢰한 것이다. 사군은 산도 좋고 물도 좋기로 이름난 충청도의 네 고을로 경상도와 강원도의 접경에 위치한 단양, 청풍, 제천, 영춘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제천과 단양에 해당한다. 조영경이 가 본 곳은 차례대로 도화동(桃花洞), 평등석(平等石), 금병산(錦屛山), 도담(島潭), 귀담(龜潭), 의림지(義林池), 그리고 마지막에 사인암(舍人巖)이다. 그러므로 제목의 뜻은 ‘사군 지역의 선계와 같은 아름다운 풍광’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린 이방운에 대해서는 미술사학계의 연구1)가 있고 이 서화첩은 국민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2006년에 원래 그림 크기대로 도록을 발간하였다. 김양지의 발문에 안숙으로 되어 있어 그동안 작가를 안숙이라 하였는데 최근 연구자에 의해 조영경으로 밝혀졌다.2) 김양지의 경우도 양지가 자(字)로 보이고 조영경의 시를 쓴 사람이 조영경 자신인지 다른 여러 명의 서가인지 분명치 않고 시에 찍은 비점과 관주 등 아직 의문점이 많이 남아 있다.

  필자는 이 도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목해서 보지 않다가 최근 한벽루의 풍광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이 화첩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 화첩이 매우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한벽루는 금병산이라는 제목의 그림에 나오는데 그 누각의 본래 운치와 풍광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소개한 시는 이 서화첩의 마지막 「사인암」에 수록된 2편의 시 중 앞의 것이다.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 유람의 즐거움이 시에 녹아 있다. 거칠 것 없는 성품과 자연 풍광을 요모조모 음미하는 자세가 엿보인다. 이 화첩의 두 번째가 「평등석」인데 그 글은 저자의 감회를 장문의 오언고시에 전서로 적어 놓았다. 다소 흥분하고 호방한 필치로 인생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유람과 기록의 의의를 진술해 놓은 것을 볼 때 여기 적힌 시들은 나름의 구도와 계산을 하고 쓴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사인암의 명칭은 사인 벼슬을 지낸 역동(易東) 우탁(禹倬)이 노닐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집고증』 권7과 성해응의 『연경재집』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에 그 사실을 기록한 걸 보면 당시에도 지명의 유래가 분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인암은 그 모양이 우선 수직으로 높이 솟구쳐 인상적인데 그게 또 가로로 갈라져 있어 마치 책을 쌓아 놓은 듯하다. 사인암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살았던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의 「사인암」 시에 “책 벼랑 천 척 똑바로 서 있어, 온종일 바라보느라 저물녘 모래톱에 앉아있네[冊厓千尺不偏斜, 盡日相看坐晩沙]”라는 구절을 보면 옛사람도 책처럼 느꼈던 모양이다.

  사인암에 가 보면 알겠지만 높이 솟은 바위 못지 앉게 넓게 펼쳐진 너럭바위와 깊은 물이 또 눈길을 끈다. 돌에 새긴 바둑판도 있고 장기판도 있다. 이윤영은 「사인암기」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바위 아래의 돌은 또 평평하고 비스듬하다. 마루나 계단, 침석이나 안석과 같은 바위들이 높이와 기울기가 모두 저마다 알맞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8,90명 정도는 앉을 수 있다. 술동이와 안주, 필연을 마음대로 앞에 놓을 수 있고 계곡 물을 굽어보고 희롱을 하며 양치를 하거나 씻을 수 있다. 바위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가면 50여 보의 거리가 되는데 바위의 북쪽 뿌리가 물에 잠겨 있고 물이 깊어 배를 띄울 수 있다. [巖下之石又盤陁, 如堂如陛, 如安牀如置几, 高下平仄, 各得其宜, 可以坐八九十人. 尊俎筆硯, 隨意在前, 俯弄溪水, 可漱可濯. 循巖自北而南, 爲五十餘步, 巖之北根浸于水, 水深可舫.]

  시에서 묘사한 평평한 상과 도톰하게 솟은 바위,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지금 그림에 보면 친구와 시종을 대동하고 가마에 편안한 자세로 앉은 이가 청풍 부사 조영경일 텐데, 강 양안을 보며 떠가는 뱃놀이보다 낫다고 말하는 걸 보면, 꼬불꼬불 바위 옆으로 난 길을 가는 재미가 아주 좋았나 보다. 그리고 가마에 기대어 주변의 풍광을 조금 높은 각도에서 스윽 훑어보는 재미가 어떻겠는가. 

  사인암을 바라본 풍경과 사인암에서 조곳이는 풍경을 동시에 한 화폭에 담기 위해 사인암은 강 건너에서 본 시점을 취하였다. 그런 방법을 통해 강 건너의 마을을 표현하고 전토의 공간을 암시하여 이곳이 한 번 유람할 만한 곳임을 너머, 가서 살고 싶은 공간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실제 그곳에 가서 산 이윤영의 「복거기(卜居記)」에 나오는 내용과도 통하고 있어 흥미롭다.

▶ 1802~1803년, 지본담채, 32.5×26cm, 국민대박물관 소장. ‘사인암(舍人巖)’ 옆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인장에는 ‘유연(游蓮)’이라 적혀 있다.

  
  뒤의 시를 소개한다. 앞의 시가 사인암에 도착했을 때의 경물에 대한 흥취라면 뒤의 시는 이 풍광에 대한 애착이 드러나 있다.

좋은 경치 구경하러 우연히 왔는데     偶來看竹意
높다란 정자에 주인은 보이지 않네     人不在雲亭
무성한 숲에 가을 석양 내리고           叢薄秋暉翳
고운 바위 결 객의 걸음 머무네          礱紋客履停
산의 모습 시 속에 담아보고              詩將山色得
흐르는 물소리에 술도 깨네               酒入水聲醒
갖춘 그 모습 아름다우니                  具體斯爲美
세속의 마음 절로 멀어지네               塵心自杳冥

  앞 두 구절은 난해하면서도 이 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첫 구절의 ‘간죽(看竹)’은 동진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의 고사를 썼다. 평소 대를 좋아하던 왕휘지가 어떤 사대부 집에 아름다운 대나무가 있는 걸 보고 가마를 타고 들어가 휘파람을 불며 한참 즐기다가 나가려 하자 주인이 문을 닫아 못 가게 만류하며 같이 즐긴 뒤에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설신어』에 예법에 얽매이지 않은 사례로 나온다. 그러니 이 시에서는 사인암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 주변의 사소한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왔다는 뜻이 되고 결국 사인암이 유람객의 마음을 크게 끌었다는 말이다. ‘높다란 정자에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사인암 절벽 틈에 정자를 짓고 산 이윤영이 이미 죽고 그의 흔적인 정자만 남아 있다는 말이다. 초정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에 “절벽을 기어올라 희미한 길 찾으니, 사면의 푸른 벼랑에 정자 더욱 좋구나[攀躋壁罅得微徑, 四面靑厓亭更好]”라는 대목으로 보아 박제가는 이 정자를 본 것 같은데,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단양산수기」에는 “서벽정은 단릉(이윤영의 호)이 지은 것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유지만 바위틈에 남아 있다.[栖碧亭卽丹陵所建, 今廢而遺址在巖竇.]”라고 한 것을 보면 조영경이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필자는 이런 산수 애호와 서화 취미가 있는 조영경이 사인암 바위에 무수히 새겨 놓은 이인상의 글씨를 왜 언급하지 않았나 궁금했다. 그래서 잘 찾아보니 귀담(龜潭)을 그린 그림에 “원령(이인상의 호)의 바위 글씨와 윤지(이윤영의 자)의 시는 귀신도 아끼고 숨겨 돌 어르신에게 문의하네[元靈鐫默胤之詩, 鬼慳神秘問石丈]”라는 한 구절이 있다. 돌 어르신은 미불(米芾)이 돌을 높여 부른 말인데, 돌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바위틈에서 이 두 사람의 글씨와 시를 찾아본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우리나라는 석각이 중국에 비해 아주 적은 편이지만 금강산의 글씨가 유명한데 못 가봤고 거창의 수승대나 동해의 무릉계곡, 가평의 조종암, 포천 금수정 주변 등은 한번 가 볼 만한데, 이 사인암이 필자에게는 전서와 예서체의 글씨로 각인되어 있다. 언젠가 평소 존경하는 선생님을 모시고 간 적이 있는데 그 글자들을 해독하느라 목이 부러질 뻔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선생님이 그 글씨를 보러 갔다 오셨기에 탄복한 적이 있다. 이 글씨는 필자도 관심이 많아 문헌을 찾아보고 했는데 소문만 듣고 있다가 이번에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찾아보니 이미 선각자들이 연구해서 정리해 놓았다.3) 다시 한 번 감탄하고 탄복할 뿐이다. 

  조영경이라는 인물은 노론의 거두인 조태채(趙泰采)의 손자로 그 후광을 입어 음직으로 관계에 나갔는데 문헌 기록에는 지방 행정을 잘못하여 주로 탄핵을 받고 처벌당한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사인암 시를 통해 일부 살펴보았듯이 이 화첩은 조영경이란 인물을 매우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화첩에 적힌 시들은 그림과 함께 당시 오지였지만 문화 명소로 자리한 사군강산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켜 줄 듯하니, 조영경이 서문에서 쓴 바람이 이루어질 것 같다.


1) 박은순, 「19세기 초 名勝游衍」과 李邦運의 『四郡江山參僊水石』書畵帖. 『溫知論叢』, 1999.
2) 고연희, 「이방운의 ‘사인암(舍人巖)’ - 조(趙)대감의 단양(丹陽)나들이」, (문화일보 2012,11,16)
3) 정민, 「사인암과 이인상 ‧ 이윤영의 제각(題刻)」, 『문헌과해석』 2005, 봄호.
柳承旻, 『凌壺觀 李麟祥 書藝와 繪畵의 書畵史的 位相』, 2005, 고려대 석사 논문.

 
김종태글쓴이 : 김종태(金鍾泰) / hanaboneyo@hanmail.net
  •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 선임연구원
  • 주요 약력
    - 고종ㆍ인조ㆍ영조 시대 승정원일기의 번역, 교열, 평가, 자문 등
  • 역서
    - 『승정원일기』고종대, 인조대 다수
    - 『청성잡기』(공저), 『名賢들의 簡札』, 『허백당집』(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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