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백아흔한 번째 이야기
2015년 9월 7일 (월)
잠자기 좋은 때

[번역문]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이 나에게 말했다.
  “그대가 일본에 갈 때 큰 바람이 불어 타고 가던 배의 돛대가 꺾이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사색이 되었는데 그대만 선실 문을 닫고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잠을 잤다고 들었네. 그대는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었나?”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공은 제가 심성을 수양하여 마음을 안정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는 생사가 배 한 척에 달려 있었을 뿐입니다. 만일 배에 도움이 된다면 제가 정말 누구보다 먼저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될 게 없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구경거리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을 따라 나와서 구경을 했을 테지요. 그렇지만 하늘과 물이 맞닿고 바람과 파도가 서로 요동을 치는데 배 위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문을 닫고 자느니만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잘 알았을 뿐입니다. 
  제가 잠을 잔 것은 그때만이 아닙니다. 사행에서 돌아오다가 오사카에 이르렀을 때 최천종(崔天宗)**이라는 사람이 왜놈의 칼에 찔리자 일행이 겁을 내며 동요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구설수에 낄까 두려워 병풍을 둘러치고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밥때가 되면 나와서 밥을 먹고 밥을 다 먹으면 다시 들어가 잤지요. 30일을 그렇게 하다가 옥사가 끝난 뒤에야 나오니 일행은 저를 그저 잠만 자는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제야 희이(希夷)***가 1000일 동안 잠을 잔 것이 바로 세상을 피하여 숨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배와도 웃었다.

*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 1717~1792. 자는 계윤(季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명릉 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천성이 바르고 출세보다는 내면의 득도에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최천종(崔天宗): 성대중이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을 때 사행의 도훈도(都訓導)였는데 오사카에서 왜인에게 살해되었다.
*** 희이(希夷): 송나라의 도사(道士) 진단(陳摶). 희이는 송 태종이 내려준 호이다. 벼슬을 단념하고 수련을 하였는데, 한번 잠을 자면 1000일 동안 잤다고 한다.

 
[원문]

金坯窩謂余曰: “聞君入日本時, 大風發船, 檣摧桅拉, 舟中皆無人色, 而君獨閉蓬戶, 睡若無事, 君何術而能此?”
余笑曰: “公以我爲有定力耶? 是行也, 生死爭一船耳. 苟益於船, 我固先衆而憂矣, 顧無益, 故不爲也. 如有可觀, 固亦從衆出也, 天水相接, 風浪相拍, 船上安所觀哉? 故不如閉戶睡爾. 我能解此而已. 然我之能睡, 不獨此也. 使還至大坂, 崔天宗被刺於倭, 一行恇撓, 唇舌百端. 吾恐其與也, 乃以屛風圍可函席, 入睡其中, 飯至則出食, 已復入睡. 三十日而獄完乃出, 一行但笑我渴睡而已, 乃知希夷千日之睡, 直爲避世方也.”
坯窩亦笑. 

 
성대중(成大中, 1732~1812),『청성잡기(靑城雜記)』 권3 「성언(醒言)」

  
  
성대중은 본관이 창녕(昌寧), 자가 사집(士執), 호가 청성(靑城)이다. 아버지는 역참(驛站)을 관리하는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인 찰방(察訪)을 지냈다. 5대조가 황해 감사, 고조가 참봉(參奉)을 지냈을 뿐 증조와 조부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몹시 한미한 집안의 아들이다. 그나마도 서얼이다. 태생적으로 출세와는 거리가 먼 배경이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문재(文才)가 있어 입소문이 났다. 영조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성대중의 시를 보고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此非左海口氣]”라고 칭찬한 것이 성대중 13세 때의 일이다.

  25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선 이후 문장으로 영조와 정조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서얼통청(庶孼通淸)의 시대적 요구가 호재(好材)로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스스로 “성대중이 공경히 올바른 길로 나아간 것을 내가 평소 좋아했다.”고 했을 정도로 정조의 사랑이 각별했다. 당시 유행하는 문체를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잡소리”라며 몹시 싫어했던 정조는 성대중이 북청 부사(北淸府使)로 나갈 때, 그해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응제(應製)에서 유행하는 문체로 답안을 작성한 문신들에게서 벌금을 받아 송별연을 열어 주기도 했다.

  통신사행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간 것이 1763년(영조 39), 32살 때이다. 13개월 걸린 여정이다. 인용한 글은 그때의 일화이다. 그해 8월 3일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이 부산에서 배를 탄 것이 10월 6일이었다. 순풍을 기다리느라 여러 날을 지체한 것이다. 일단 출발한 배는 빨리도 달렸다. 나가사키 근처의 섬 이키[壹岐]까지 480리를 가는 데 겨우 3시간 걸렸다. 지금 시간으론 6시간이겠다. 그동안에 거센 풍랑을 만났다.

  상상해 보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닥친다. 바다가 뒤집히며 물결이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배를 삼킬 듯 솟아오른다. 배는 물결에 밀려 앞뒤 좌우로 흔들리며 당장에라도 엎어질 것만 같다. 사람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배의 움직임에 따라 앞으로 뒤로 정신없이 나뒹군다. 누구는 울부짖고 누구는 멀미로 뱃속을 모두 비워내며 하얗게 질렸을 상황은 바람 드센 날 배를 타본 사람이라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순간 치목(鴟木 배의 키)이 뚝 부러져 나갔다. 배가 방향을 잃고 무섭게 요동쳤다. 정사(正使) 조엄(趙曮)이 국서(國書)를 짊어지고 고물[船尾]에 나앉아 선원들을 독려했다. 다행히 예비 치목으로 겨우 안정을 되찾아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그 소란 속에서 성대중은 태평하게 선실에 들어가 잠을 잤단다. 배짱이 두둑한 것인지 둔한 것인지. 하지만 귀 여겨 들을 말은 잠을 잔 이유이다. 걱정해도 도움 될 게 없고 구경할 거리도 없으니 잠이나 자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을 도모하지 말라.[不在其位不謀其政]”고 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도 있다. 배는 선원에게, 국서는 정사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아우성도 참견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어디 그런가, 일만 생기면 한 마디쯤 거들고 싶어 간질거리는 입을 단속하기가 쉽지 않다. 소용없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정책을 비판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댓글도 달아 본다. 그래서 가끔은 배가 산으로 가는 것 같은 일이 비일비재 벌어진다.

  성대중이라면 그랬으리라, “에라 잠이나 자자.”

  친인척의 경조사 참석마저 꺼리게 했던 메르스의 공포도, 숨을 헐떡이게 하던 무더위도 다 지나갔다. 그동안 잠을 잤건 비분강개하여 열변을 토했건 지나갈 건 어차피 지나가고, 이제 9월, 가을이다. 모든 일은 그 일을 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성대중처럼 푹 잠이나 자야겠다.


  

  
김성재글쓴이 : 김성재
  •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 번역위원
  • 주요 번역서
    -  정조대 『일성록』 번역 참여 
    - 『고문비략(顧問備略) 』, 사람의무늬, 2014

Posted by 聖枝: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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