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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필의 '노자주' 본문

문학과 예술

왕필의 '노자주'

성지 2014. 5. 11. 12:56

왕필의 무의 형이상학(形而上學)




 ◉ 왕필(王弼 226 ~ 249)


위진(魏晉)시대 현학(玄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노자(老子)의 주석서 가운데 그의 심오한 주석을 능가하는 저서는 지금까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유표(劉表)였는데 유표에게 역()을 가르쳤던 사람은 고조부 왕창(王暢)이었고, 증조부 왕찬(王粲)과, 왕필의 형 왕굉(王宏)은 모두 역학의 달인이었다. 집안의 학문적 성격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역학을 익혔지만 왕필은 뛰어난 천재였다고 생각된다.


왕필(王弼)은 중국 삼국시기 위()나라 사람이며, 산양(山陽 지금의 하남河南 초작焦作)에서 태어났다. 는 보사(輔嗣)이며 상서랑을 지냈다. 진나라 사람 하소(何邵)가 지은왕필전王弼傳..,


왕필은 어릴 때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지혜로웠다. 나이 십 여세에 노자를 좋아하고 변론에 통달하였으며 말을 아주 잘하였다. 부친 왕업(王業)은 상서랑(尙書郞)이 되었다. 그때 배휘(裵䘗)가 이부랑(吏部郞)이었는데 왕필이 아직 약관(弱冠 20)이 못되어 그를 찾아뵈러 갔다. 배휘가 만나고 나서 왕필을 아주 특이하게 여겼다.  얼마 안 있어 유명해졌다. 이부 상서 하안(何晏)이 그를 매우 훌륭히 여겨 품평하기를 왕필은 두려워할 만하니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더불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논할 수 있다.”


왕필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현학적 시각으로 통합시켜 18세에 '노자주(老子註)', 20대 초반에 '주역주(周易註)'를 지어 이름을 떨치다 24세에 요절했다저서로는 노자주》《주역주》《논어석의(論語釋疑가 남아있다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이름 높았던 그는 2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현재에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후견이었던 하안(何晏)과 함께 위진 현학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이름을 떨쳤던 왕필의 노자 주석서는 현재에 이르러서도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왕필은 24세로 요절한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명주석으로 꼽히는 《노자주외에 중국의 역사에서 천여 년에 이르는 동안 사대부들의 과거시험의 교과서로 쓰였던주역주를 남겼다.

 

 

◎ 왕필(王弼)의 무()의 형이상학(形而上學)


왕필은 천도(天道)의 원기자연(元氣自然)이라는 한나라 시대의 왕충(王充)의 학설과 다른 자기의 독특한 학설을 전개하였다. 그는 노자의 ()는 무()로부터 생겨난다.’는 구절에 근거하여 도()를 무()로 해석하고 다음과 같이논어석의(論語釋疑에 귀무론(貴無論)을 전개했다.


()란 무()를 일컫는 말이다. 만물은 이곳을 통하지 않음이 없고 거치지 않음이 없다. 그것을 비유하여 '()'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요하여 아무런 형체가 없기에 형상으로 나타낼 수가 없다.”



노자(老子주석의 대표작, 왕필의노자주


왕필이 살았던 당시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무대가 된 시기로 위..오 삼국 사이에 생사를 건 전쟁이 계속되던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따라서 왕필은 한말 대제국의 피폐와 붕괴 속의 무질서를 바라보며 시대적 혼란을 구제할 수 있는 근본적 방안을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갖게 되었다.


노자주를 중심으로 한 노자사상과주역주를 중심으로 한 주역사상을 자신의 사상의 두 축으로 삼은 왕필은 근본적인 명교의 근원과 근거문제를 추구하며 도()를 찾았다. 그리하여 노장의 무위자연의 도()와 주역의 변화와 시의, 그리고 간이의 관념을 종합하여 도출한 근원적 일자로서의 무 관념을 철학적 원리로 하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수립했고, 그것은 위진현학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노자'와 왕필의 '《노자주' - 임채우 옮김, - 한길사


- 목 차 -

1.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하지 않으니

2.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3.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이 다투지 않고

4. 도는 비어 있어 아무리 써도 막히지 않고

5. 천지는 인자하지 않으니 만물을 지푸라기로 보고

6.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7. 천지는 장구하게 지속되나니

8. 최고의 선은 물과 같나니

9. 갖고 있으면서도 더 채우려는 것은

10. 정신을 하나로 모아

11.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로 모여

12. 오색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13. 은총을 받거나 굴욕을 당하거나

14. 보려 해도 볼 수 없으니 은미하다 하고

15. 도를 얻은 이유는

16. 완전히 비우고 조용함을 지키라

17. 최상의 덕을 가진 왕은

18. 대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드러나고



주역 왕필주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 왕필 지음, 임채우 옮김, 출판사 - 길


주역 왕필주는 위진 시대 현학의 대표적 사상가인 왕필에 의하여 이루어진 도가 철학적 색채를 가진주역주석서이다오래 전부터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주역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꼽혔다.


이 책에는 주역 상하경에 대한 왕필주를 본문으로 담고그 뒤에 계사전설괘전잡괘전에 대한 한강백의 주와 왕필의주역약례를 부록으로 수록하였다맨 뒤에는주역에 대한 해제와 함께 주역의 주석들을 읽을 때 알고 있어야 할 역학 이론들을 정리하였다. (전면 개정판)

- 목차 -

전면 개정판을 내면서

개정판 서문

추천의 말

일러두기

주역 왕필주 상경 

1. 건乾 / 2. 곤坤 / 3. 둔屯 / 4. 몽蒙 / 5. 수需 /

6. 송訟 / 7. 사師 / 8. 비比 / 9. 소축小畜 / 10. 이履 /

11. 태泰 / 12. 비否 / 13. 동인同人 / 14. 대유大有 / 15. 겸謙 /

16. 예豫 / 17. 수隨 / 18. 고蠱 / 19. 임臨 / 20. 관觀 /

21. 서합서합 / 22. 비賁 / 23. 박剝 / 24. 복復 / 25. 무망无妄 /

26. 대축大畜 / 27. 이이 / 28. 대과大過 / 29. 감坎 / 30. 이離

주역 왕필주 하경

31. 함咸 / 32. 항恒 / 33. 돈돈 / 34. 대장大壯 / 35. 진晋 /

36. 명이明夷 / 37. 가인家人 / 38. 규규 / 39. 건蹇 / 40. 해解 /

41. 손損 / 42. 익益 / 43. 쾌쾌 / 44. 구구 / 45. 취萃 /

46. 승升 / 47. 곤困 / 48. 정井 / 49. 혁革 / 50. 정鼎 /

51. 진震 / 52. 간艮 / 53. 점漸 / 54. 귀매歸妹 / 55. 풍豊 /

56. 여旅 / 57. 손巽 / 58. 태兌 / 59. 환煥 / 60. 절節 /

61. 중부中孚 / 62. 소과小過 / 63. 기제旣濟 / 64. 미제未濟

부록 1 계사·설괘·서쇄·잡괘전 한강백주韓康伯注

계사전 상 / 계사전 하 / 설괘전 / 서괘전 / 잡괘전

부록 2 주역약례

「단전彖傳」의 의의를 밝힘(明彖) / 효가 변화에 통함을 밝힘(明爻通變)/

괘가 변해서 효에 통함을 밝힘(明卦過變通爻) / 상을 밝힘(明象)/

자리를 변별함(辯位) / 약례略例 하下 / 괘략卦略

해제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노자는 기원전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의 창시자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81년을 있다가 이미 백발이 성성한 채 태어났다고 하여, 늙었다는 뜻에서 노자(老子)라고 불렸다. 그는 한때 주나라에서 왕실 서적을 관리하는 수장실 관리였다고 한다. 주나라가 쇠하자 노자는 주나라를 떠나 숨었다. 이때 관문을 지키던 관윤이라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글을 청하자 도교 경전인 도덕경을 지어줌으로써 비로소 후세에 그의 사상이 남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주나라의 예법과 제도는 붕괴하고 사회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당시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이 난세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는데, 그 결과 온갖 꽃이 만발하듯 갖가지 제자백가사상이 발생했다. 노자사상의 근저에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정치적 현실과 유가사상의 편협성과 인위성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노자사상이 형성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노자는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사상을 반성적으로 검토하면서 그의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나갔다.


노자는 마침내 도()라는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했다. 도란 바로 길이다. 만물이 다님으로써 저절로 생겨난 길이다. 그래서 바로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무위(無爲)와 타고난 본성대로 따르는 자연스러운 길이 도이다. 도를 따라서 무위자연의 삶을 살 때 인간도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심지어 인간과 만물을 지배하는 초월자로 믿었던 하늘이나 상제조차 이 무위자연의 도를 따르고 이에 의존한다고 하여 도를 최고이념으로 정립했다.



▷ 과학이 있는 곳에는 노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노자사상은 중국 사상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노자사상은 장자와 열자 등에 의해 직접적으로 계승되었고, 유가와 더불어 상호 비판을 주고받으며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킨 두 축이 되었다. 위진 시기에는 노장사상으로 유가의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현학(玄學)이 등장하며, 인도에서 전입된 불교가 노장사상의 바탕 위에서 이해됨으로써 불교의 정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장사상은 묘당의 유교가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로 흐를 때 그를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판적 대안이었고, 산중에서 불로장생과 우화등선을 추구하던 연단술의 사상적 원천으로서 동양의 과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과학기술사에 대한 대작을 남긴 조지프 니덤 같은 이는 중국에서 과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노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양의 고전 노자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을 필두로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한문 주석본이 나올 정도로 많이 연구되었고, 동양사상의 원천으로 각계각층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현재는 서양에서도 가장 많이 읽히는 동양 고전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신과학운동이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노자는 간결한 운문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문의 글자수는 총 5,200여 자에 불과한 짧은 글이다. 그 체제는 상, 하편(또는 , 德經) 81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노자의 주석은 대단히 많다. 원 대의 두도견은 도덕경에 주를 단 이는 삼천여 가()에 달한다고 했지만, 현재까지 이름만 전해지는 노자주석의 수는 천여 개를 웃돈다. 현재 간행된 노자주석 중에는 대만에서 편집한 무구비재 노자집성(無求備齋 老子集成)의 초편과 속편에 수록된 349종이 가장 많은 것이다. 이 주석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한 대의 하상공주(河上公注)이고 다음으로 오래된 주석이 왕필의 노자주이다. 하상공의 주는 불로장생술의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고, 왕필의 주는 현학적(衒學的) 입장에서 씌어진 것으로, 이 고주(古注)들은 사실상 노자주석의 대표로 읽혀왔다. 그 가운데 왕필의 주는 철학성이 풍부한 내용을 간결한 문체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왕필주의 글자수는 11,980자로 노자 원문의 2배에 불과하여, 특별히 주석이 긴 38장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상 노자원문과 왕필 주석의 글자수가 비슷한 경우가 많다.



▷ 18세에 노자주를 쓰다


왕필은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226년에 태어나 23세의 나이에 요절했는데, 후견이었던 하안과 함께 위진 현학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이름을 떨쳤다. 파란의 시대를 살았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노자주 가운데 최고의 명주석으로 꼽히는 노자주와 천여 년 동안 과거(科擧)의 교과서로 쓰였던 주역주를 남겼다. 노자주를 중심으로 한 노자사상과 주역주를 중심으로 한 주역사상이 왕필 사상의 두 축을 구성하고 있다.


왕필이 살았던 당시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무대가 된 시기로 위, , 오 삼국 사이에 생사를 건 전쟁이 계속되었고, 사회 전체에는 부화(浮華)한 말폐가 만연해 있었다. 한말 동중서적(董仲舒的)인 명교(名敎) 체계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고, 새로운 사회질서와 이 질서를 뒷받침할 만한 사상체계는 아직 수립되지 못했다. 왕필은 한말 대제국의 피폐와 붕괴, 대규모의 농민반란과 삼국의 하극상적 발호와 무질서를 목도하면서, 당시 시대적 혼란을 구제할 수 있는 근본적 방안을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갖게 되었다. 당시는 한 대의 명교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 하나의 시대사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왕필의 사상도 이런 시대 사조의 영향 아래 생겨난 신사상이었다.



▷ 무의 관념을 통해 어지러운 세계를 평정한다


왕필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근원적으로 검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는 당시의 사회문제에 대해서 단순히 비판과 부정에만 그치거나 현실도피적인 방향으로 일탈하지 않았고, 윤상(倫常)을 확립하자고 구호를 외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문제로 삼았던 것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는 특히 명교의 근원과 근거문제를 추구했다. 이런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 위에서 욕망의 소종래(所從來)와 명교의 소이연(所以然) 문제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참된 도가 무엇인지를 찾았다. 왕필은 이런 문제의식을 통해 무를 근본으로 하는 철학체계를 수립했다. 사회철학적으로 그는 현실의 변화에 대한 시의적절한 대응과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무의 관념을 통해 어지럽게 동탕(動蕩)하는 세계를 평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무의 추구는 한나라의 거대하고 복잡한 명교체제와 번망했던 한 대 경학(經學)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도출된 철학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장의 무위자연의 도와 주역의 변화와 시의(時義), 그리고 간이의 관념을 종합하여 도출한 근원적 일자로서의 무 관념을 철학적 원리로 하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이는 한 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예교 질서에 대해 간이하면서도 보편적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위진현학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왕필은 위진현학가로서 예로부터 비판이 있었고, 노장사상적인 측면 때문에 일부에서 이단시되어온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왕필은 주자나 왕양명과 나란히 중국의 공자 문묘에 종향되는 48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이래로 숙종 때까지 문묘에 종사되었던 점을 상기해보면, 예로부터 중요한 인물로서 숭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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