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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대축일 & 광복절 본문

창립자 F.빨라우

성모 승천 대축일 & 광복절

성지 2013. 8. 15. 21:00

성모 승천 대축일 &  광복절


예로부터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은 

우리나라 광복절에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며

성모님의 인류애를 기리며 찬양합니다.






▷ 오늘의 미사 제1 독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19; 12,1-6ㄱㄷ.10ㄱㄴㄷ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 졌습니다.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 광복절 노래


작곡, 윤용하[각주:1]. 작사, 정인보  

  1.  흙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년 뜨거운피 엉긴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건가 지난날을 잊을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가꿔 길러 하늘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 작곡가 윤용하








  

'그리운 금강산' 

작사, 한상억. 작곡, 최영섭.

노래:홍혜경과 플라시도 도밍고




  1. 윤용하(尹龍河, 1922 ~ 1965) 1922년 황해도 은율(殷栗)에서 3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세례명은 요셉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 가난한 옹기장사 부모를 따라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서양 선교사 신부들에게 오르간을 배웠다. 선양(瀋陽)에서 졸업했다.

    그 뒤 만주의 가톨릭교회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음악에 심취하여, 당시 선양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였던 가네코(金子)로부터 틈틈이 작곡·화성학 등의 기초를 배웠고 20대 초반에 이미 칸타타 <조선의 사계>를 작곡 연주하고 만주성당에서 미사곡을 편곡해 지휘하는등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드러냈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에서 자작동요 100곡 발표회를 열고 서울 신당동 본당 성가대를 지휘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워낙 순수한데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격 때문에 말년까지 매우 궁핍하게 살았다고 한다. 또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은 이상한 날로 여길 정도로 막걸리를 좋아했고 43살 나이에 숨을 거둔 직접적인 원인도 술로 인한 간경화증이었다고 한다. 지인들은 덥수룩한 머리에 막걸리를 좋아한 자연인 어떤 처지에서도 순수한 동심을 잃지 않았던 소박한 예술가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한다.

    윤용하 선생과 가깝게 지냈던 아동문학가 이석현(세바스티아노)씨가「경향잡지」(1991년 12월호)를 통해 윤선생은 나를 만날 때마다 가톨릭에 주일학교용 노래가 없다. 가톨릭 동요와 교회음악을 작곡할 테니 내게 가사를 달라고 졸랐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성가도 몇 곡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악보는 유실된 상태라고 한다.

    윤용하선생은 박태현(朴泰鉉) · 이흥렬(李興烈)등과 함께 음악가 협회를 중심으로 국민개창운동(國民皆唱運動)을 벌이는 한편, 서울 한양공업고등학교와 동북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가곡과 동요를 작곡하여 발표했다. 6·25 때에는 종군작가로서 군가와〈사병의 꿈〉등을 작곡하였고, 국민 가요인〈민족의 노래〉,〈광복절의 노래〉등을 발표했다.

    대표 가곡은〈보리밭〉,〈동백꽃〉,〈한가윗달〉등이 있고, 동요는〈나뭇잎 배〉,〈무지개다리〉등이 있다. 그 밖에 미완성 오페라《견우직녀》, 오페레타《해바라기 노래》, 교향곡《개선》등이 있지만, 그의 주된 작품영역은 서정적 멜로디가 특색을 이루는 가곡이었다. 그는 평생을 가난 속에 살면서 심한 주벽을 버리지 못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심과 순수성을 잃지는 않았던 작곡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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