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d's Feet on High Places

홍음(洪吟) - '도중행(道中行)' 본문

Hind's 샘터

홍음(洪吟) - '도중행(道中行)'

성지 2013. 3. 22. 23:30

《홍음(洪吟)》2권 -  이홍지(李洪志) 선생


홍음을 읽고 감명받았습니다.
특히 3권이 좋습니다. ^^*

마치 밭갈다 진주를 발견한 듯..,

진주를 어루만지고 싶어졌습니다.^^
홍음(洪吟)을 가끔 올리려 합니다.




  •  도중행(道中行)[각주:1]

    이홍지(李洪志) 선생


    큰 도가 세간에서 펼쳐지나니

    미혹 속에 있는 생명을 구하는도다.

    명(名), 정(情), 이(利)를 씻어버리거늘

    어떤 어려움이 성스러움을 가로막을쏘냐.


    2001년 3월 19일


 





  1. 중국 한(漢)나라 관공서에서 사용했던 예서(隸書)체로 쓰여진 구도(求道)에 대한 시(詩)입니다.

    ☞ 서체(書體)의 종류

    1. 갑골문자(甲骨文字) - 중국 최초의 문자. 귀갑(龜甲: 거북의 뱃가죽)과 수골(獸骨: 짐승의 뼈)에 새겨진 문자. 고문자(古文字)의 한 체(體)로서 서예에서 간간이 쓰인다.

    2. 대전(大篆) - 일명 종정(鐘鼎: 종이나 쇠로 만든 솥 등의 기물)에 쓰여 진 문체文體) 혹은 금문체(金文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대(殷代)에서 주대(周代)까지 약 1300 ~1400년에 걸쳐 쓰였던 체(體)로서 개중에는 은허(殷墟)문자보다 앞서 발굴된 것도 포함한다.

    가장 오래 된 것은 거의 회화(繪畫)와 비슷한데 고대 동기(銅器)상에 관지(款識)된 것으로 수백 종이 현존하고 있다. 매기(每器)의 글자 수는 일정치 않으나 적은 것은 1자로부터 많은 것은 수 백자에 달하는 것도 있다.

    글자 수도 많고 습자용(習字用)으로도 적합한 것으로는 모공정(毛公鼎)·산씨반(散氏盤)·맹정(孟鼎)·괵계자반·제공뇌·왕손종(王孫鐘)·극정(克鼎)·홀정·송정(頌鼎)등이 있다. - 저의 블로그 카테고리 '사서오경'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의 유래'를 참조하세요. -

    3. 소전(小篆) - 진나라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뒤 정승 이사(李斯)로 하여금 진도(秦都) 지방에 유행되는 서주(西周)문자를 정체(正體)로 하고 여기에 다소의 가감(加減)을 하여 쓰기 간편하게 만들어 천하에 통용토록 한 서체이다.

    진시황(始皇)과 이세(二世)는 사방으로 천하를 두루 살피며 돌아다녔는데 그때마다 돌에 새겨 비를 세웠는데 모두 없어지고 태산(泰山)에 새긴 각석(刻石) 9자와 낭야대 잔석(殘石)만이 전해진다고 한다.

    이외로 전해온 자체(字體)는 모두 모조품이라고 한다. 다만 후한(後漢)시대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소전(小篆) 의 해석이 되어있어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으로 간주한다.

    4. 예서(隸書) - 진나라 이사(李斯)의 소전(小篆)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정막(程邈)이 예서체(隸書體)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서체는 계속 정리되고 개변되었어 관공서에서 사용되었다.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三國)시대 이후 점차 쇠퇴하여 당(唐)나라 이후에는 쓰이지 아니하였다. 오늘날 백 수 십종에 달하는 한대(漢代) 비석(碑石)이 전하여진다.

    5. 해서(楷書) - 해서는 예서체에서 파책법(波磔法)을 제거한 서체로서 빠르게 쓸 수 있는 속사용(速寫用)의 서체라 하겠는데, 현재 통용되는 해서는 위(魏)나라 사람 종유가 지은 것이라 전하여지나 이전에 이미 해서가 유행되었기 때문에 해서체를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본다.

    동진(東晋)의 명필가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父子)는 서성(書聖)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오늘날 전하여지는 그의 각석(刻石)으로는 주효후비(周孝侯碑)가 있다. 그 밖에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賛)>등의 소해서(小楷書) 법첩(法帖)이 왕희지의 이름으로 전해진다. 해서는 수(隨)·당(唐)시대에 유행하였으니, 구양순(歐陽詢)·우세남(虞世南)·저수량은 초당(初唐) 삼대가(三大家)로, 안진경(顔眞卿)·서호(徐浩)·유공권(柳公權)은 중·만당(中晩唐)의 삼대가로 일컫는다.

    6. 행서(行書) - 한나라 말엽 유덕승(劉德升)이 지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고 예서나 해서처럼 자연적인 변천으로 이룩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이는 해서를 약간 흘려 쓴 것으로 전서(篆書)나 예서처럼 번거롭지 않고, 해서처럼 판에 박듯 모난 서체가 아니며, 초서(草書)처럼 읽기 어렵지도 않아서 읽고 쓰기에 편리해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실제로 행서가 비석에 새겨진 것은 당 태종(太宗)의 <진사명(晋祠銘)>을 최초로 간주한다. 그 뒤에 고종(高宗)의<만년궁명(萬年宮銘)>·<기공송(紀功頌)>·<영국공이적비(英國公李勣碑)> 등이 있으며, 개원(開元) 이후 이북해(李北海) · 소영지(蘇靈芝)등 서예대가는 전적으로 비석에 행서체로 새겨 넣었다. 행서는 비각으로서는 알맞은 체가 아니며 오히려 서예법첩(書藝法帖)으로 전하는 것이 많다.

    7. 장초(章草)와 초서(草書) - 장초는 한나라 황문령(黃門令) 사유(史游)가 지은 것이라 하고, 초서는 한의 장지(張芝)가 지은 것이라 전하나 신빙성이 없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장초는 글자 하나하나가 독립된 초서이고 초서(草書: 금초(今草)라고도 함)는 위아래 글자가 계속 연결된 것으로 금초는 장초를 속사(速寫)한 것이다. 초서체는 동진(東晋)때에 유행하였는데 왕희지 부자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