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d's Feet on High Places

바르도 퇴돌 첸모(Bardo Thodol Chenmo) 5 본문

바르도 퇴돌(Bardol)

바르도 퇴돌 첸모(Bardo Thodol Chenmo) 5

성지 2012. 10. 26. 00:10

바르도 퇴돌 첸모(Bardo Thodol Chenmo) 5[각주:1]

1990년대에 의식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모았던

《자유를 위한 변명》에서  만나는바르도 퇴돌





  • 전위무용가 홍신자의《자유를 위한 변명》
    1993년 5월 13일 초판(8쇄)

    - 차 례 -
  • 머리말
  • 정글 속에서 - 지금의 삶에 대하여 -
  • 가슴에는 남기지 않는다. -표현에 대하여 -
  • 구도의 춤꾼이 되어 - 나의 춤에 대하여 -
  • 언제나 혼자지만 - 고독에 대하여 -
  • 해골을 껴안고 - 죽음에 대하여 -
  • 몸이 곧 법당 - 몸에 대하여 -
  • 굴레를 벗고 굴레 속으로 - 가족과 결혼에 대하여 -
  • 절정의 순간 - 임신과 출산에 대하여 -
  • 자연스러울 수만 있다면 - 성과 사랑에 대하여 - 
  • 벗고 살 수 없다면 - 살림 · 꾸밈 · 먹거리에 대하여 -
  • 마지막 스승은 자연 - 스승과 종교에 대하여 -  

   홍신자는 그녀의 책 《자유를 위한 변명》에서 티벳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각주:2]



   티벳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뼈로 악기를 만들기도 하고 목걸이나 의식용 제구등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허벅지 뼈는 훌륭한 피리가 된다. 납작하게 잘라진 두개골은 두 개가 장구처럼 맞붙어 딱딱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는 작은 북이 된다. 이런 것들은 티벳 사람들이 사는 곳 어디서든 쉽게 볼 수가 있었다.



  특히 두개골은 문자 그대로 해골 바가지로 만들어 거기에 쌀을 담아 두기도 한다. 쌀을 담아 둔 해골은 티벳의 어느 여염집에서나 볼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양식을 담아 둔다기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듯, 하나의 의식적인 행위로서 그렇게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인골(人骨)은 어쨋거나 죽음의 잔유물이요 흔적인데도 그렇게 티벳 사람들은 삶의 현장으로 그것들을 끌고 들어와 이곳 저곳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혐오나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매우 친숙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피부로 느꼈다. 죽음에 대한 그들의 그러한 친밀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나는 궁금했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있어 죽음은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가장 큰 숙제중의 하나였다. 


-------  중략  -------

 

다르질링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다르질링은 인도 북단의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곳인데,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티벳에서 망명해 온 티벳인들이 새로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중국, 인도, 네팔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곳에 가기 위해선 산을 빙빙도는 기차를 타고 무려 여덟시간을 올라가야 한다. 얼마나 지대가 높은지 다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구름이 발 아래에 깔려있고 그 밑으로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이 세상인지 저 세상인지, 나는 그 아래를 굽어보며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나라에 내가 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티벳 사람들의 생활과 그 생활 속에 파고 들어와 있는 죽은 자들의 뼈를 만났던 곳이 바로 이 다르질링이었다. 나는 여기서 죽음과 관련된 의식을 하나 목격하게 되었는데, 내가 볼 때 그것은 바로 49 일재(日齋)였다. 그것을 그들은 '바르도 퇴돌(Bardo Thodol)'이라고 했다.



   인간이 죽어도 49일 동안은 그 혼이 모든 것을 느끼기 때문에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아직 죽지않은 이 혼은 좀 더 좋은 세계로 가기 위해 일생동안 공부한 것을 동원해서, 마치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듯 저 세상을 찾아가게 된다. 이 기간에 그의 주위에서는 경험 많은 승려들이 줄곧 경을 읽어 준다. 경을 읽어주는 것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꿈을 얘기함으로써 상기시켜 주듯 이 세상에서 배운 것들 중 희미한 것에 대해서 다시 얘기해주는 과정이다. 이렇게 가면 되고, 저렇게 가면 된다. 잊어 버리지 말라. 이러이러한 빛을 찾으라, 놀라지 말라.  이런 식으로 49일 동안 계속 귀띔을 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뼈로 된 악기와 장신구가 동원되었다.



이 모든 것이 티벳판 사자의 서라고 할 수 있는〈바르도 퇴돌〉에 연원을 두고 있었고, 그곳에는 이것을 공부하는 승려들이 아주 많았다. 그들은 높은 차원의 세상으로 가지 못하면 다시 이 세상의 고통 많은 중생으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어떻게든 더 높은 차원의 세상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3년 짜리바르도 퇴돌〉공부 과정이 있다기에 찾아가 보았더니 놀랍게도 서양사람들까지 있었다. 거기에 앉아 내리 3년을 그것만 공부하기 위해 그들은 멀리 유럽에서 이 고지로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놀랍긴 했지만, 죽음 이후의 시간을 위해서 3년을 공부할 생각은 나에게 아직 없었다. 나에게 급한 것은 죽은 자로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가 아니라,  산 자로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죽음의 상황과 영혼의 행로를 말하고 있는바르도 퇴돌〉의 대의만은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들의 틈에 끼어 공부를 시작했다.바르도 퇴돌〉은 육신의 죽음 이후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육신을 끌고 다니는 존재일 뿐이요, 또한 죽음 뒤의 행로를 알기 전에는 당장 살아 있는 자로서 직면해야 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급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죽고 나서의 49일이 아니었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아직 죽지 않은 날에 내가 가져야 할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얻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바르도 퇴돌〉은 체험이라기보다 강독(講讀)의 대상이었다.



   어느날 우리를 가르치던 라마승이 죽은 사람의 두개골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해주었다.  

"사람의 두개골을 보면 그것이 많은 수행을 거친 사람의 것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것인지 알수 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의 두개골에는 구멍이 크게 뚫려 있는데 거기로 그 사람의 영혼이 빠져 나간것이다."



그는 그럴게 믿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전의 공부가 사자의 육신에 어떻게든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은 굳이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떨쳐버릴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정면으로 맞서 보려고 하고 있었기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두개골이란 화재를 놓치기 전에 재빨리 그에게 부탁했다.



"저에게 두개골을 하나 구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많은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의 것이라도 좋습니다만 ……,"

"무엇에 쓰려는가?"

"항상 같이 있고 싶습니다."

"무엇과 같이 있고 싶다는 건가, 죽음과?"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까지 죽음이 아니라면 해골과라도 항상 맞붙어 있어 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인골로 만든 악기나 목걸이 등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가공되고 기능이 강조됨으로써 죽음이 거기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죽음의 형상이 좀 더 많이 남은 해골 그대로가 필요했다. 그라면 그것을 구해 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눈빛으로 부탁의 강도를 높였다.



  며칠 뒤, 그 라마승은 아래쪽이 떨어져 나간 해골 ― 해골 바가지였다. ―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해골을 처음으로 만져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손을 몇 번이나 접었다 폈다 하며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덥석 받아들었다. 느낌이 꺼림직했다. 생전에 공부가 부족했는지 구멍은 없었다. 바르도 퇴돌은 언젠가 다음 기회에 그것의 깊은 부분까지 다시 배워보리라 생각하며 나는 해골 하나만을 달랑 들고 그를 떠났다. 그 뒤로 이것은 어디를 가든 나를 따라다녔다.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 해가 지자 적막이 깊어져 숨소리만 크게 들리는 외딴 오두막집에서 해골과의 첫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촛불을 켜 놓고 해골을 들고 혼자 앉아 우선 그것을 쓰다듬어 그것의 촉감을 느껴 보는 것으로 그것과의 관계를 시작했다. 어떤 거부감이 손끝에서 일어나 휙 온몸을 휘감는다. 꺼림직한 느낌. 이 느낌은 무엇일까? 이 느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나는 물론 나중에야 그것을 알았다. 그것은 나의 에고였다. 나는 그러나 아직 그것을 모른 채였고, 당장은 그 꺼림직한 느낌의 본체를 주시하기 위해 계속 매달릴 뿐이었다.



  나는 그 해골에 물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것을 마셔 보려고 했다. 그것을 입 앞으로 가져가긴 했지만 도저히 입술에 댈 수가 없다. 망설이다 도로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그것을 든다. 몇 번을 이렇게 시도한 뒤에에 겨우 그것을 입술에 댈 수 있었고 억지로 입 안으로 물을 밀어넣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물을 삼킬 수가 없다. 토악질을 하듯 물을 뱉어 내고 한참 동안 해골을 바라 보기만 했다. 다시 그것에 손을 뻗었다. 이번엔 눈을 질끔 감고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딸그락하고 뼈가 내 이빨과 부닺혔다. 치가 떨렸다. 입으로 들어온 물을, 그 어떤 생각이 일어나기도 전에 재빨리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몸서리를 치면서 해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지독한 거부감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대단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해골에서 손이 자라나고 그 손이 내 손을 붙잡고 함께 나락으로 곤두박질하는 모습을 언뜻 보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두려움의 진원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해골은 나에게서 아무 것도 빼앗가 가지 못한다. 해골에게는 그러한 힘이 없다. 나에겐 해골에 빼앗길 만한 그 무엇도 없다. 나의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해골을 다시 집어 올려 남은 물을 바닥까지 마셔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몸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것에 아무 것도 빼앗기지 않는다. 아니, 나에게는 빼앗길 게 아무것도 없다. 해골로 인해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피부에 내려앉을 때까지 나의 가슴, 얼굴, 팔과 다리, 내 몸의 모든 부분을 온통 그것에 내맡기며,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두려움이 가라앉았고, 나는 진정되어 해골을 껴안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걱정했던 악몽 같은 것은 없었다.





  다음날부터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해골하고 만큼은 친숙해졌다. 해골에 나는 밥을 담아 먹었다. 그것은 내 공양그릇이 되었다. 나에게 그릇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잠을 잘 때 그것은 머리맡에 놓여 내 잠의 파수꾼이 되었다. 해골에게 나는 말하였다.


   "너는 나의 죽음이고 나의 밥그릇이다. 나와 함께 다니자."

   

  나는 죽음과 관련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죽음을 가장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시신을 태우는 불길이 솟고 있는 화장장이었다. 인도의 웬만한 강변에는 거의 화장장이 있다. 화장장은 인도 생활 내내 나의 가장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나는 수시로 화장장을 찾았고, 거기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명상을 했다.



  거기에서 내가 발견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도 사람들은 죽어서 그곳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그곳을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궁극적으로 맞이해야 할 죽음의 장소를 살아서 찾아오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아름다움을 느꼈다. 나도 저들처럼 나에게 죽음이 가까웠을 때 그것에 수동적으로 당하지 않고 그것을 정면에서 적극적으로 맞아들이리라. 아직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저토록 죽음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게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도 저들처럼 죽음을 대하리라고 생각했다.






☞ ≪티벳 사자(死者)의 서()≫「경전과 주해[각주:3]


첫째 권치카이 바르도 초에니바르도


1부 치카이 바르도죽음을 맞는 순간의 사후세계



1. 치카이 바르도의 첫 번째 단계

죽음의 현상에 대한 몇 개의 가르침,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최초의

투명한 빛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 최초의 빛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사람 

1. 영적인 가르침을 베푼 스승

2. 진리의 형제

3. 종교를 가진 학식있는 자.

4. 분명하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구해서 이 가르침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읽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자는 전에 가르침 받은 내용을 떠올리고 그 즉시 존재의 근원에서 비쳐 나오는 투명한 빛을 깨달아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 최초의 빛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시기

    호흡이 멎었을 때 사자의 생명력[각주:4]은 지혜가 머무는 생명 에너지 센터로 내려간다. 그리고 사자의 의식체는 자연 상태에서 최초의 투명한 빛을 체험할 것이다. 그 뒤 생명력은 신체의 뒤쪽으로 가서 척추 오른쪽과 왼쪽의 생명 에너지 통로를 통해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이 때 사후세계가 순간적으로 밝아오게 된다.

    따라서 생명력이 배꼽에 있는 생명 에너지 센터를 통과한 뒤 왼쪽에너지 통로 속으로 달려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여기에 적힌 지시대로 해야만한다.  일반적으로 생명력이 이렇게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내부에 아직 들숨이 남아있는 기간으로 , 밥을 먹는데 걸리는 시간 만큼이다.



▷ 구체적인 방법 제시

    마지막 숨이 막 멎으려고 할 때 의식체의 탈바꿈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 사자를 인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있다. 육체로부터 의식체의 분리가 효과적으로 이뤄지면 바르도 상태를 겪지 않는다. 바르도 상태란 죽음에 의해서 의식이 일단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티벳인들은 이런 경우에 사자에게 이 경전을 읽어주도록 되어 있다.


  임종을 맞이하는 자의 귀에 대고 여러 번 경전을 반복해서 읽어 주어야 하는데 호흡이 아직 완전히 멎기 전이라도 여러 번 읽어서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게 한다. 날 숨이 멎으려고 하면 임종자를 오른쪽으로 돌려 눕힌다. 이 자세는 '사자(獅子가 누워있는 자세[각주:5]'로 불린다. 그리고 목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동맥을 누른다. 



  이때 임종자가 잠에 빠져들려고 하거나 수면상태가 계속되려고 하면 이를 막아야 하며, 목의 동맥을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눌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척추의 에너지 통로에 있는 생명력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직 머리 정수리의 '브라흐마의 구멍(백회혈, 사하스라라차크라)'을 통해 확실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사자를 인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이 순간에 모든 사람은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 '르마카야'의 완전한 마음을 처음으로 얼핏 목격하게 된다.



  마지막 날숨이 멎고 아직 몸 안에 숨이 남아 있는 기간이 바로 생명력이 중앙 에너지 통로에 머무는 기간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의식체가 기절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는 가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사자의 인격이 선한가 악한가, 그리고 생명력과 에너지 통로의 상태가 어떤가에 달려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명상의 경지를 약간이라도 체험한 사람과 건전한 에너지 통로를 가진 사람은 이런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된다.



  누르스럼한 액체가 시신의 여러구멍으로부터 나오기 시작할 때까지 앞의 문장을 사자에게 반복해서 일러줘야만 한다.  이승에서 육체를 지니고 영적인 수련을 할 때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해탈의 단계가 바로 이때에 나타닌다. 이후, 점차적으로 바로 다음의 하위단계로 상징되는 잠재의식의 세계인 바르도로 안내되는데  이승의 수련단계에서 나타나는 잠재의식의 현신과는 달리 사후의 바르도에선 거꾸로 상급단계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인 하급단계로 이어진다. 악한 인생을 걸어 온 사람이나 건전하지 못한 에너지 통로를 가진 사람은 이 상태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길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길어야  밥 먹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걸린다.



  티벳사자의 서≫ 해설문을 쓴 '존우드로프'는 "에반스 웬츠의 표현을 빌리면.., 죽음이라고 부르는 붕괴 과정이 임종자의 정신에 영향을 미쳐 어떤 소리들이 그에게 들리는데 그 소리는 윙윙, 우르릉, 딱딱 하는 소리로 임종자의 마음에 들리며, 임종 전과  임종 후 15시간까지 들린다고 한다. 이것은 1618년 '그룬왈디(Greunwaldi)'에 의해서 확인되었고, 후대 사람들도 몇차례 언급했으며 1862년 '콜링스(Collingues)'는 그 주제에 대해 특별한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죽음은 삶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고 예술이다. 그 둘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봐야 옳을 것이다."라고 하며  아래의 인도 북동부 뱅갈 지방의 격언을 소개했다.[각주:6]



"자파(신의 이름을 부름)와 타파스(고행)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 비밀 경전들에서는 죽음에 접할 때, 기절 상태가 발생 하여 3일 반가량 이어진다고 하고, 또 다른 경전들에서는 4일 동안 이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자신을 두껍게 감싸고 있는 탐욕과 집착이라는 죄업의 바람에 내쫓기는 가련한 윤회의 감옥살이를 계속하게 되는 하위단계의 바르도로 안내되는데 바로, 여기 '치카이 바르도'와 '초에니 바르도'에서 지복의 경지로 들어가는 소중한 해탈의 기회를 잃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죽는 순간  &  바르도의 전개

 순   서

 현신하는 몸(三神)

현신의 외적 상징

형   태 

해   탈

 1. 죽는 순간
    치카이 바르도

  다르마카야(法身)

  본질의 몸

붓다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갖는 몸

형상을 초월하는 투명한 빛, 

 임종자가 투명한 빛을 인식하면
 다르마카야 속에서 대자유 획득

 2. 두 번째 단계
    치카이 바르도

  삼보가카야(保身)
  다르마카야의 1현신

보디사트바[각주:7]에게 보이는 형태를
 지니고 나타남. 예) 미카엘 대천사

 다섯 명의 명상하는 붓다
 오선정불(五禪定佛)

 해탈은 형상을 통해서 이루어짐
 극락세계, 천국으로 인도된다.
 3. 초에니 바르도  니르마나카야(化身)
  탈바꿈된 몸

 세상에 화신하는 종교에 따라 다른
 수 많은 붓다들 예) 고타마 붓다.

 다양한 개인의 몸,  물질화
 하여 나타남

 형상을 통해서 해탈이 이루어 짐
 극락, 천국으로 인도된다.




  정광명(淨光明)이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단계가 다음 단계의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사후세계인 ‘초에니 바르도이다이때  우리가 만다라에서 볼 수 있고 티벳사자의 서에 묘사되어 있는 수많은 불보살(대일여래, 아촉 여래, 아미타불, 금강살타, 관세음보살 등등)과 예수성모마리아석가모니, 예언자 마호메트 등의 현신으로 상징되는, 자신에게 친숙한 그 무엇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단계로서 우리의 작은 지식으로 한계 지을 수 없는 바르도이기에이 기간동안 계속해서 경전에 기록된 방법에 따라 투명한 빛으로의 인도가 행해져야만 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임종을 맞이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죽음의 현상을 진단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전에 이미 죽음의 현상에 대한 지식을 터득해 둘 필요가 있다. 즉, 임종자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죽음의 현상들을 진단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투명한 빛을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지 않고 직접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만일 임종자가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 영적 스승이나 또는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제자나, 또는 그와 매우 가까웠던 진리의 형제가 그의 곁에 머물면서 그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현상들을 순서에 따라서 임종자에게 생생하게 일깨워주기 위해 경전에 있는 문장을 반복해서 읽어 줘야 한다. 



죽음의 모든 현상의 시작되고 끝나갈 때까지 임종자의 귀에 대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반복해서 경전을 읽어주고 호흡이 완전히 멈춘것이 확인되면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임종자의 목에 좌우 동맥을 단단하게 눌러줘야 하는데 영적인 수양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 경전을 읽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경전을 분명하고 정확한 목소리로 세 번 또는 일곱 번 반복해서 읽어 줘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임종자가 생전에 영적 스승에게서 배운 내용을 기억하고  임종자의 순수의식이 투명한 빛을 깨닫게 되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고 존재의 근원과 영원히 하나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따르면 임종자는 "틀림없이 영원히 자유에 이르게 되리라"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2. 치카이 바르도의 두 번째 단계

사후에 곧바로 나타나는

두 번째 투명한 빛에 대한 가르침



  최초의 투명한 빛을 깨닫게 되면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나 만일 최초의 투명한 빛을 깨닫지 못한다면 두 번째의 투명한 빛이 사자앞에 나타난다. 이것은 호흡이 완전히 정지되고 나서 한끼의 식사 시간, 한 식경(30분)쯤 지난 뒤에 일어날 것이다. 생명력이 척추의 중앙 에너지 통로를 통과하게 되면 임종자는 즉시 가장 순수한 상태의 투명한 빛, 전혀 때묻지 아니한 '다르마카야'의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도표참조] 그리고 만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깨어있지 못하면 다음으로 두 번째 '투명한 빛'을 체험하게 된다.[각주:8]



  사자가 살아있을 때 좋은 카르마를 쌓았는가 나쁜 카르마를 쌓았는가에 따라서 생명력은 오른쪽이나 왼쪽 에너지통로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신체의 적당한 출구를 통해 빠져나간다. 이 때 마음의 상태가 갑자기 밝아진다.  최초의 투명한 빛이 나타나 있는 상태가 한 식경 정도 지속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에너지 통로의 상태가 좋은가 나쁜가와 과거에 명상수행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달려있다.



  생명이 끊어져 의식체가 몸 밖으로 나왔을 때 사자는 "내가 죽은 건가, 살아 있는 건가?"하고 반문한다. 그는 그것을 분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울음소리까지 듣는다. 카르마가 만들어내는 공포스런 환영들은 아직 나타나기 전이다. 또한 죽음의 왕(명(冥府) 심판자)들의 무서운 환영도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영적 스승 또는 읽어주는 이들은 해당되는 경전을 읽어 사자를 인도해줄것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완성 과정의 구도자와 시각화 과정의 구도자에 따른 안내를 지시하고 있는데 완성과정의 구도자라면 그의 이름을 부른뒤 투명한 빛으로 인도하는 앞의 가르침들을 거듭 반복해서 들려주고 시각화 과정에 있는 구도자라면 경전의 자신의 수호신에 대해 명상하는 법과 수행 지침서를 큰소리로 읽어주고 경전에 제시된 경문을 염송하고  일반 세속인에게는 아래와 같은 경전의 내용을 읽어줘야 한다.



"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위대한 자비를 지닌 신에 대해 명상하라! "



자신이 사후세계에 와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이 가르침을 받으면 틀림없이 자각하게 된다. 살아있을 때, 영적 스승의 도움으로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도를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 그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분명하게 사후세계를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스승이나 진리의 형제가 이런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인식시켜 줘야 한다고 경전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이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일지라도 죽음을 가져다 준 질병의 충격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환영을 감당하지 못할 수가 있다. 이들에게도 이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살아있을 때 이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계율을 어겼거나 근본적인 의무를 정직하게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한 생태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들에게도 이 가르침은 더없이 필요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후 세계의 첫번째 단계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사자가 사후세계의 두번째 단계에 있는 동안 분명하게 이 가르침을 들려줘서 일깨워야 한다. 그러면 그는 마음이 깨어나고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사후세계의 두번째 단계에 있는 동안 사자의 몸은 빛나는 환영체[각주:9]라고 부를만한 성질을 갖는다.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밝음의 상태가 사자에게 나타난다.[각주:10]



임종자가 이 상태에 있을 때 이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실천하면 어머니 진리세계와 아들진리 세계가 만나게 되는데[각주:11] 이를 법성모자(法性母子)라고 한다. 육체를 벗어버리기 전에는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였던 진리의 세계를 맞대고 봄으로써 카르마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태양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도(道)의 투명한 빛은 카르마의 힘을 무산시켜 버린다. 법성모자는 원문의 초에니 마부(Chos-nyid-ma-bu)를 번역한 것으로 산스크리트어로는 마트리 푸트라(Darma-Matri- Putra)라고 한다. 



그 의미는 '어머니와 아들의 진리세계'에서 아들 진리의 세계는 명상을 통하여 이승에서도 체험할 수 있지만 어머니 진리세계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진리 세계여서 오직 사후에만 경험할 수 있는 진리의 세계의 일치를 나타낸다. 하위 바르도에서 카르마의 힘이 적용하기 전에, 임종자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균형 잡힌 여기 이곳의 바르도 상태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경전에서 지적하고 있다.[각주:12]

 


사후세계의  이 두 번째 단계는 죽은자가 사념체[각주:13]를 갖고 있을 때 밝아 온다. 의식체는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활동이 제한된 영역 안에서 배회한다. 이때 이 소중한 가르침이 죽은이에게 잘 전달되기만 하면 틀림없이 목적을 이룰 것이다. 왜냐하면 카르마의 환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사자는 영원한 자유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방황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고있다.





 






다음 - 바르도 퇴돌 첸모(Bardo Thodol Chenmo) 6
           
2부 초에니 바르도[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사후세계]- 계속



 




  1. [출처]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 Bardo Thodo≫ 파드마삼바바 지음, 라마 카지 다와삼둡 번역, 에반스 웬츠 편집, 류시화 옮김 . - 정신세계사 - [본문으로]
  2. 《자유를 위한 변명》구도의 춤꾼 홍신자의 자유롭고 파격적인 삶의 이야기 - 정신세계사 - p 113 ~ p 119 해골을 껴안고 - 죽음에 대하여 - [본문으로]
  3. ≪티벳사자의 서≫ 237~258 첫째 권【치카이 바르도 - 초에니바르도】- 제1부 치카이 바르도【죽음을 맞는 순간의 사후세계】
    [본문으로]
  4. 프라나(prana), 기(氣), 생기(生氣)로 번역되기도 한다. 원문의 룽(rlung)은 생명의 바람, 생명의 힘, 심령의 힘을 뜻한다. [본문으로]
  5. '사자(獅子)가 누워있는 자세'는 죽어 가는 사람에게 전통적으로 추천되는 자세인데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눕는 자세이다. 이때 오른손은 오른쪽 콧구멍을 막고서 턱 아래에 놓고, 왼손은 왼쪽 허벅다리에 얹는다. 그리고 발은 쭉 뻗어 아주 살짝 구부려야 한다.
    잠자는 사자의 자세는 붓다가 열반에 들 때 취했던 자세로서, 사찰의 탱화에 자주 보인다. 이 때오른쪽 콧구멍을 막고 오른쪽으로 눕는 이유는 몸의 오른쪽 부분에 미혹의 카르마 바람을 고취하는 미묘한 채널이 자리하므로, 이러한 오른쪽 채널을 막아 죽음의 순간 떠오르는 광명을 쉽게 알아차리기 위해서이다.
    또 이 자세는 의식이 빠져나갈 수 있는 몸의 다른 구멍을 자연스럽게 막아 주므로, 의식이 머리 정수리의 틈을 통해 육신에서 빠져나가는데 수월하다. 깨달은 자는 잠자는 사자의 자세에서, 의식은 양 눈의 초점인 미간에 맞춰지고, 시선은 눈앞의 하늘에 고정된다. [본문으로]
  6. ≪티벳사자의 서≫ p 206, 209 [본문으로]
  7.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는 의 '보디(bodhi)'는 'hudh(깨닫다)'에서 파생되어 깨달음ㆍ지혜ㆍ불지(佛智)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트바(sattva)'는 'as(존재하다)'를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을 뜻한다.
    이 용어와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BC 2세기경 석가모니가 전생(前生)에 수행한 여러 행적에 대해 기록한<본생담(本生譚)>에 나온다. 여기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석가모니'를 칭송하여 보티사트바라고 지칭하였다고한다.
    [본문으로]
  8. 치카이 바르도의 두번째 단계, 좀 더 낮은 상태이다. 여기서 다르마카야는 카르마의 어둠으로 약간 흐려진 상태가 된다. 이는 삼보가카야(保身)로 다르마카야의 1차 현신이자 형상으로 인식된다.
    [본문으로]
  9. 유체(幽體, astral body), 환신(幻身), 사념체(思念體), 욕망체(慾望體)등 여러가지로 부른다. 원문의 dog-pahi-sgyu-lus는 순수한, 빛나는 환영체라는 뜻이고 산스크리트어의 마야루파(maya-rupa)이다. 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는 아니지만 그 형태에 있어서는 지상에서 갖고 있던 육체의 복제품이다. [본문으로]
  10. 육체로부터 의식체가 떠날 때 영적진동 현상이 일어나고 이것은 의식체에게 밝은 상태를 가져온다. [본문으로]
  11. 법성모자(法性母子)는 어머니 광명과 어린아이 광명이라고도 하는 근원적 광명(Clear Light)과 관련된 명상에 쓰이는 개념이다. 치카이 바르도 두 번때 단계에 나타나는 근원적 광명으로 이는 우리의 본성이다. [본문으로]
  12. 경전에서 어머니 진리세계와 아들 진리세계의 관계는 사진과 피사체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본문으로]
  13. 원문은 위킬루(yid-kyi-lus)로 정신체, 욕망체, 사념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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